
양주성 장로 (문헌정보팀)
2025년 3월 31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후대들에게 가장 필요한 ‘복음’
…“그래야 아이들이 살아갈 수 있다”
넷플릭스에 공개된 4부작 영국 범죄 드라마입니다. 13세 소년 제이미 밀러가 동급생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됩니다. 이 사건을 통해 소년의 가정과 학교를 둘러싼 이 시대 청소년 문제, 가정의 문제를 되짚어보며 디지털 시대, 과거와 비해 위험도 줄어들고 안전해진 것 같지만 기성세대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디지털, 가상 공간의 세계가 얼마나 우리 후대들을 무너뜨리고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청소년기에는 2차 성징이 드러나면서 생각보다 커가는 신체와 그에 비해 제대로 된 경험 을 하지 못한 마음은 불균형을 겪습니다. 그러나 이 발달단계에서 청소년 시절을 통과하게 되면서 아이들은 어려움과 갈등, 문제를 겪고 성장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부모는 아이들이 자기가 겪었던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하려 애를 쓰고 어찌 되었든 가족과 아이들이 안전하기를 바랍니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실패할지라도 끝까지 스스로 해볼 수 있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해본 경험은 비록 실패일지라도 소중한 자산이 됩니다.
그러나 누구나 부모가 되면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처음 해보는 일입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사람이 시행착오를 겪습니다. 그 과정에서 가정과 후대가 상처를 받거나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늘 불안과 공포로 살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만은 안전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비록 문을 잠그고 있지만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 집안에 있는 아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에게 디지털 세계는 과거 기성세대가 경험했던 거친 세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진짜 세상의 폭력보다 더 잔인한 폭력이 은밀하고 치밀하고 집요하게 아이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인셀이라는 말로 프레임이 씌워진 아들은 13세의 나이에 비자 발적 독신이라는 오명이 씌워졌습니다. 아이들은 이런 아이의 비참한 현실에 ‘좋아요’와 하트를 눌러가며 백 마디의 말보다 더 잔인한 폭력을 즐겨왔습니다. 결국 아들은 살인을 저지릅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명백한 디지털 집단 괴롭힘에 시달리던 아들의 정신상태입니다. 이미 아이들은 인간이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획득한 정서적인 성장이 멈춰버린 채 살인을 하고도 비싼 운동화라는 생각에 운동화를 버리지 못할 정도로 미성숙하고 비뚤어진 생각으로 각인된 아이가 되어버립니다.
이 드라마에는 주인공 아이와 그 아이들의 학교 친구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학교에는 더 이상 배움이라는 것이 멋쩍을 정도의 이상한 모습입니다. 아이들은 책 대신 영상을 시청하고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일일이 눈맞춤 하지도 않습니다. 주인공의 담임 선생님은 자신의 강의를 좋아하는데도 주인공 아이를 잘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자신의 학생을 기억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선생 같지 않은 선생과 공동체의 룰과 책임, 인간으로서 배워야 할 기본적인 소양마저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너무나 쉽게 경멸할 대상을 만들어 집단 괴롭힘을 하고 심지어 그 아이가 죽었음에도 이 잔인한 놀이의 심각성을 알지도 못합니다.
주인공을 심리 상담하는 상담사의 대화는 이 아이에게 심어진 잘못된 남성성을 찾아내려는 의도된 질문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프로이드와 융은 정신분석학의 틀을 만든 대가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거의 100년 전의 사람들입니다. 미래에서 온 아이를 과거에서 온 어른이 100년 전에 만들어진 프로이드, 융과 같은 정신분석학의 고전에서 만든 틀대로 판단하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같은 시대를 사는 기성세대들조차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디지털 시대를 주 활동공간으로 살고 있는 아이들입니다. 이제 그 아이들을 과거의 잣대로 판단하고 치료하려는 노력은 시급히 갱신될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이 부분에서 심리 상담이 앞으로 과연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전혀 다른 세상속에 다른 기준과 잣대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에는 가정을 지키려는 구시대를 상징하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좋아하면서도 아버지의 방식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학교에서도 디지털 방식으로 따돌림을 당하는 아들, 그리고 이 아이와 비슷하면서도 아직은 문제가 되지 않은 거대한 청소년 집단이 등장합니다. 드라마 속의 아이들이지만 아마 이 세대의 상당수의 아이들이 이런 생각 속에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머리를 쭈뼛하게 만듭니다. 과연 우리는 이 아이들을 어떻게 치유하고 살릴 수 있을까요?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뺏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정말 아이들을 살리려면 최첨단의 좋은 디지털 문화를 흑암의 문화로 만들고 있는 보이지 않는 어둠과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어야 합니다. 다시 공동체를 회복하고 배움을 다르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죽어버린 영혼을 살려야 합니다. 그 영혼을 살릴 방법은 2천 년 전에 이미 우리에게 주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방법은 그 길 하나뿐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유일하면서 죽어가는 인간에게는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