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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오후 5시의 부름

박루카스 선교사 (복음의 빛 교회, 독일 포츠담)

2026년 10월 25일

우아한 무단 점유자와 찢어버린 영수증 : 요한복음이 폭로하는 ‘진짜 죄’와 율법주의의 비극



어느 마을에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고아들을 돌보고, 전 재산을 털어 가난한 이웃을 도왔으며, 누구에게나 친절했습니다.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전혀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에게는 치명적인 비밀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가 살고 있는 화려한 대저택과 그가 베푸는 모든 재산은, 원래 주인을 내쫓고 서류를 위조해 무단으로 빼앗은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을 사람들의 눈에 그는 흠 없는 '성자'였지만, 진짜 주인의 눈에 그는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강도'이자 '반역자'였습니다.

이 비유는 성경이 인간의 상태를 바라보는 시선을 정확히 대변합니다. 우리는 흔히 도덕과 윤리, 혹은 종교적 열심의 잣대로 서로를 평가하지만, 요한복음 16장 9절은 우리의 얄팍한 상식을 향해 서늘하고도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16:9)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살인이나 도둑질 같은 윤리적 문제나, 교회에 빠진 종교적 나태함이 아니라, 단순히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어떻게 성경이 지목하는 가장 끔찍하고 근원적인 죄가 될 수 있을까요?

 

이 역설을 머리가 아닌 삶 전체로 증명해 낸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사울’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살인범도, 파렴치한 사기꾼도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고백했듯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하며 십일조를 철저히 구별하던 도덕적·종교적 완벽주의자였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주일성수, 철야 기도, 금식, 봉사를 단 한 번도 빼먹지 않은 교회 내 최고 모범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자신을 향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라고 처절하게 고백합니다. 결코 겸손을 떤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피땀 흘려 쌓아 올린 그 '종교적 완벽함'이 사실은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밀어내고 그분의 은혜를 가장 맹렬하게 거부하는 '교만의 철옹성'이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내 힘으로 의로워질 수 있다는 그 지독한 확신이야말로 십자가의 은혜가 들어설 자리를 원천 봉쇄하는 가장 치명적인 죄였습니다. 바울의 이 뼈아픈 깨달음은 신학적으로도 명확히 입증됩니다.

존 칼빈(John Calvin)은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2.1.4)에서 아담의 타락, 즉 인류가 범한 근원적인 죄의 뿌리를 '불신앙(Unbelief)'으로 규명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의 말씀을 멸시하고,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려 한 그 '오만함'과 '반역'이 곧 죄의 본질입니다. 윤리적 타락이나 바울이 가졌던 종교적 오만함은 모두 이 근원적 불신앙(뿌리)에서 파생된 증상(열매)에 불과합니다.

역사적 개혁교회의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제6장)는 인간의 타락과 죄의 본질을 다루면서, 죄란 단순히 몇 가지 도덕적 규칙을 어기는 표면적 행위를 넘어 "하나님과의 원래적 의(義)와 생명의 교제(Communion with God)에서 떨어져 나간 상태"라고 선언합니다. 즉, 생명의 근원이신 창조주와의 연합을 스스로 끊어버리고 피조물이 삶의 주인이 되려한 근원적 반역과 단절이 바로 죄의 뼈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며 "다 이루었다" (요 19:30)고 선언하신 사건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저지른 모든 윤리적, 도덕적 파탄과 종교적 교만의 죄에 대한 완벽한 '영수증'입니다. 십자가에서 그 빚이 전액 지불되었습니다. 이제 심판의 기준은 ‘얼마나 도덕적이고 종교적인가’가 아닙니다.

내 모든 빚을 갚아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로 압축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가장 치명적인 죄인 이유는, 창조주가 피 흘려 지불하신 그 완전한 사죄의 영수증을 면전에서 찢어버리고 끝까지 "내 힘으로 내 삶을 책임지겠다"고 버티는 완악함의 극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안타까운 비극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완성된 이 은혜의 복음을 선포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성도들에게 무거운 율법의 짐을 다시 지우고 있습니다.

주일성수, 십일조, 금식, 전도, 각종 봉사와 선교, 새벽기도 출석 여부 같은 종교적 행위들을 신앙의 척도로 삼고, 이를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면 노골적으로 ‘죄인’ 취급을 합니다. 강단에서 쏟아지는 매서운 정죄 속에서, 성도들은 어떻게든 그 율법적 기준을 맞춰보려 안간힘을 쓰다 결국 "나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어"라며 깊은 절망과 죄책감에 빠져버립니다.

단언컨대, 이러한 신앙 형태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정면으로 위배하는 타락입니다. 종교적 행위로 자신의 의(義)를 증명하려는 태도, 그리고 그것을 요구하는 목회적 압박은 사도 바울이 피 토하듯 경고했던 ‘다른 복음’(갈 1:6)입니다. 이는 성도들에게 다시 자기 힘으로 빚을 갚으라고 채찍질하는 비성경적인 폭력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모순되는 의문이 생깁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죄가 사해졌다면, 왜 사도 요한은 이토록 강력하게 도덕적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할까요?

신약학자 존 스토트(John Stott)는 『요한서신 강해』에서 이 딜레마를 '자격(Sonship)'과 '사귐(Fellowship)'의 차이로 풀어냅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법정적 무죄 선언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원한 신분을 얻었습니다. 이 신분은 도덕적 실수로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녀가 죄를 지을 때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는 단절되고 어두워집니다.

강해 설교의 거장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 역시 그의 『요한일서 강해』에서 이를 '신분(Union)'과 '교제(Communion)'의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거나 세상을 사랑할 때 하나님과의 연합(Union) 자체가 끊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분과 깊은 교제(Communion)에서 오는 영적인 생명력과 기쁨은 메말라 버립니다.

성경이 죄를 경계하는 이유는 지옥에 갈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빛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풍성한 사귐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함입니다. 종교적 행위나 도덕적 순결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버지와 깊이 교제하는 자에게 맺히는 자연스러운 생명의 ‘열매’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참된 복음이 선포되는 목회 현장에서는 율법주의적 압박 대신 진정한 영적 치유가 일어납니다.

종교적 무력감으로 "나는 역시 안 되는 죄인인가 봅니다"라며 찾아온 성도에게, 복음적인 목회자는 "더 강하게 결단하고 똑바로 살라"는 율법적 처방을 내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상담합니다.

"성도님이 지금 짓고 있는 진짜 무서운 죄는 봉사를 못 하거나 도덕적으로 넘어진 그 행동 자체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성도님의 그 연약함을 덮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 예수님의 완전한 용서보다 자신의 절망적 행위를 더 크게 여기는 그 '불신앙'이 진짜 죄입니다."

성도들의 시선을 자신의 '종교적 실적'에서 십자가의 '완전한 은혜'로 돌리게 할 때, 성도는 비로소 정죄감의 굴레에서 벗어나 은혜가 주는 참된 힘으로 죄를 이겨낼 동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진흙탕에서 놀다가 온몸이 오물투성이가 된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아이가 더러워졌다고 해서 호적에서 파내지 않습니다. 부모의 마음을 찢어지게 하는 진짜 비극은, 아이가 몸이 더러워졌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닙니다. 자신이 더러워졌다는 이유로 혼날까 봐 두려워, 씻겨주려는 부모의 손길을 뿌리치고 차가운 길거리로 도망쳐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의 치명적인 죄 역시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묻히는 도덕의 오물들, 율법적 잣대에 미치지 못하는 연약함은 십자가의 은혜로 얼마든지 씻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씻기시려고 두 팔 벌려 다가오시는 창조주의 손길을 거부하고, 십일조와 봉사, 주일성수라는 종교적 우물가에서 내 힘으로 깨끗해지겠다고 버티며 끊임없이 절망하는 그 율법주의적 고집.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이 고발하는, 오늘날 우리 교회가 가장 시급히 돌이켜야 할 가장 깊은 절망이자 진짜 죄의 민낯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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