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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성경적 언어 세계관(13)

구성학 목사 (천안아산우리교회)

2026년 7월 19일

칼빈 신학의 심장 :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기독교강요』 3권 23장, “네 가지 양태로 읽는 칼빈의 유기론”


『기독교강요』 3권 24장은 칼빈의 예정론 가운데 가장 오해를 많이 받는 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24장을 읽고 "칼빈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구원하고 어떤 사람은 버리기로 미리 결정하셨다고 말한다"는 결론만 얻는다. 그러나 칼빈이 왜 이 장을 썼는지, 무엇을 방어하려고 했는지, 어떤 목회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이해하려면 해석의 관점이 중요하다.

 오늘 대부분의 신자는 예정과 유기를 네 가지 양태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인다. 어떤 이는 느낌으로(종교적), 어떤 이는 옳은 명제로(교리적), 어떤 이는 지켜야 할 논리·수행으로(규칙적), 또 어떤 이는 살아 있는 말씀의 사건으로(언약적, 존재론적) 이 교리 앞에 선다. 그렇다면 칼빈이 23장에서 유기를 변호할 때, 그의 의도는 이 네 양태 가운데 어디에 가장 가까웠는가. 이 글은 칼빈을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격렬한 변증의 한복판에서 결국 독자를 어디로 데려가려 했는지 발견하려는 것이다.

 

Ⅰ. 『기독교강요』 3권 23장은 무엇을 말하는가?

  

먼저 장면을 보아야 한다. 칼빈은 영원한 선택을 논하고(3.21), 그것을 성경으로 확증한 뒤(3.22), 23장에 이르러서 유기 교리에 늘 쏟아지는 비방을 반박한다. 그리고 곧이어 그 선택을 부르심으로 확증한다(3.24). 즉 23장은 차가운 사변의 장이 아니라, 공격받는 교리를 지켜 내는 변증의 장이다.

 그 변증의 칼날은 날카롭다. 칼빈은 선택이 필연적으로 유기를 함축한다고 보며, 하나님의 뜻을 ‘의의 최고 규범’으로 둔다. 그 뜻 위에 더 높은 원인은 없으며, 그 원인은 "하나님 자신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말한다. 언약적 존재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이 ‘감추어진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 이성이 해부해야 할 형이상학적 비밀이라기보다,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원한 자기 발화’(utterance/영원한 말씀)의 근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말씀하시기 이전의 하나님 뜻은 인간에게 설명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직 경배 되어야 할 영역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타락마저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었다는 칼빈의 진술은 하나님이 죄의 원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타락이라는 역사적 사건조차 하나님의 언약적 경륜 밖에서 발생한 우연한 사건이 아님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아담의 타락마저 하나님의 작정에 속함을 인정하며 그 유명한 고백을 내놓는다. "이 작정은 참으로 두렵다(decretum horribile)." 그러나 같은 호흡에서 칼빈은 결코 하나님을 죄의 원흉으로 만들지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가 정한 대로 넘어지나, 자기 잘못으로 넘어진다"고 못 박는다. 멸망의 원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창조 질서를 떠나 스스로 부패한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23장은 '작정'과 '필연'을 다투는 강한 교리적 변증으로 읽힌다. 그러나 칼빈이 이 변증을 어디로 데려가는지를 보면 그림이 달라진다. 그는 감추어진 것을 "헤아릴 것이 아니라 경배하라"며, 예정을 캐묻는 호기심은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labyrinth)"에 들어가는 일이라고 경고한다. 언약적 존재론의 관점에서 이것은 인간이 비가시적 하나님의 뜻을 자기 이성으로 점유하려는 시도가 결국 타락한 아담의 길을 반복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감추신 것은 추론으로 침범할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할 영역이다. 그래서 선택을 알려거든 사변의 미궁이 아니라 한 곳을 보라고 한다. 곧 그리스도라는 "선택의 거울(speculum electionis)"이다.

 칼빈에게 자신의 선택을 확인하는 길은 감추어진 하나님의 작정을 해부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 발화되어 나타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이다. 결국 칼빈에게도 ‘감추어진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이 해명해야 할 비밀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경배하고 신뢰해야 할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적 자기 계시의 근원이었다.

 그러므로 23장의 형식은 교리적 변증이지만, 그 의도는 사변의 종결이 아니다. 칼빈의 의도는 피조물을 낮추고, 값없는 자비를 높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확신을 세우고, 마침내 경배로 데려가는 데 있다. 이 구분 — 형식과 의도의 구분 — 을 손에 쥐고 네 양태로 살펴보자.

 

Ⅱ. 네 가지 양태로 칼빈을 읽다

 

1. 종교적 이해로 읽으면 — 체험으로서의 선택

 이 양태는 유기를 느낌의 문제로 바꾼다. “나는 택자인가? 나는 선택받았다고 느끼는가?” 확신의 근거가 내면의 정서적 체험에 놓인다. "누가 천국 가고 누가 지옥 가는가?"

 종교적 관점은 항상 구원의 결과에 관심이 있으며, 유기(reprobatio)는 "버림받은 사람들의 명단"처럼 이해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자신을 끊임없이 점검하게 된다.

 하지만 칼빈의 목적은 "하나님이 구원을 주도하신다"를 말하려는 것이지, "누가 버림받았는지 찾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칼빈이 막으려는 길이다.

 체험에 근거한 확신은 체험이 식으면 절망으로, 체험이 뜨거우면 교만으로 기운다. 칼빈은 확신을 내면의 느낌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거울에 두었다. 그러므로 종교적 양태는 칼빈의 의도와 어긋난다.

 

2. 교리적 이해로 읽으면 — 명제의 방어

 이 양태는 23장을 옳은 명제들의 묶음으로 읽는다. 유기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중 예정, 작정, 유기의 필연성을 정확히 정의하고 방어한다. 매우 체계적이며, 논리적이고, 이단을 막아낸다. 이 관점에서 유기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한 요소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23장의 형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 23장은 실제로 교리를 지키는 변증이기 때문이다. 후기 개혁주의 정통주의가 바로 여기에 선다.

 그러나 칼빈의 의도는 명제의 소유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는 호기심의 미궁을 경고했고, 감추어진 뜻을 헤아리려는 시도를 책망했다. 명제적 앎(scire)이 관계적 앎(야다)을 밀어내고 그 자체로 종착점이 될 때, 교리적 양태는 칼빈이 가장 경계한 사변으로 굳어 버린다. 곧 교리적 양태는 칼빈의 형식을 붙들지만, 그것이 살아 있는 복음 선포가 아니라 신학적 개념으로 변할 위험이 있고, 터미널(terminal)이 되는 순간 칼빈의 의도에서 멀어진다.

 

3. 규칙적 이해로 읽으면 — 미궁의 해부, 혹은 수행의 증명

 칼빈은 ‘선택은 인간의 행위 이전에 있는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그럼에도 이 양태는 작정을 논리로 해부하거나(스콜라적 호기심), 선택을 행위로 증명하려 한다(“네 선택을 행실로 입증하라”). 곧 규칙을 어긴 자에 대한 형벌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두 길 모두 칼빈이 정면으로 경계한 것이다. 전자는 그가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이라 부른 바로 그 호기심이며, 후자는 확신을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의 수행에 옮겨 놓는다. 칼빈의 의도와 가장 날카롭게 충돌하는 양태가 바로 이것이다.

 

4. 언약적 존재론적 이해로 읽으면 — 말씀 → 존재 → 응답

 언약적 존재론의 관점에서 보면, 선택과 유기는 먼저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과 관계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존재가 생겨나고, 그 존재는 반드시 그 말씀에 어떤 방식으로든 응답하게 된다. 이를 이해하려면 인간의 존재 구조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인간은 두 차원에서 살아간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존재하게 하신 근원적 차원이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생명의 자리이다. 둘째는 인간이 자신의 생각과 판단, 욕망과 선택으로 살아가는 삶의 차원이다. 칼빈이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넘어지지만, 자기 잘못으로 넘어진다"(『기독교강요』, 3.23.8)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존재의 근원이시며 역사를 주관하시지만, 인간의 죄와 책임은 인간 자신이 살아가고 선택하는 삶의 영역에 속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지만, 죄의 원인이 되지 않으신다.

 이런 관점에서 유기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임의로 멸망시키기로 적극 결정하셨다는 뜻이라기보다,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머물지 못한 존재가 결국 자기 안의 죽음과 무질서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은 존재를 붙드시지만(히 1:3), 그 말씀에서 벗어난 인간은 스스로 멸망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 독해에서 유기는 하나님의 대칭적·자의적 적극 작정, 곧 ‘멸하려고 사람을 지으심’이라는 희화가 아니다. 유기란 생명의 말씀에 중첩되지 못한 가시성, 곧 스스로 무(無)로 돌아가려는 경향성이다(창 3:19). 모든 존재는 능력의 말씀으로 붙들림으로(히 1:3), 그 붙드심에 잇대지 못한 자리는 죽음의 질서로 기운다.

 반면 선택은 추상적 작정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적용되는 생명의 발화다(엡 1:4). 바로 이 지점에서 언약적 독해는 칼빈과 만난다. 칼빈도 선택의 거울로 그리스도를 가리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양태는 교리를 버리지 않는다. 명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명제가 다시 살아 있는 말씀이 되어 존재 안에 심기고 응답으로 드러나게 한다. 유기 교리 앞에서 합당한 응답은 작정을 해부함이 아니라, 낮아짐과 경배와 그리스도 안의 확신이다. 이것은 정확히 칼빈이 “헤아리지 말고 경배하라”고 한 그 자리다.

 

Ⅲ. 종합 — 어떤 양태가 칼빈의 의도에 가장 가까운가?

 

 네 양태를 대어 본 결과 칼빈의 의도에 가장 가까운 것은 언약적 존재론적 이해다. 그것만이 칼빈이 향한 네 가지—피조물의 낮아짐, 값없는 자비의 높임, 그리스도 안의 확신, 경배로의 응답—을 함께 담는다. 교리적 이해는 23장의 형식을 정확히 포착하지만, 그것이 종착점이 될 때 칼빈이 경계한 미궁이 되고, 종교적 이해와 규칙적 이해는 칼빈의 의도를 오히려 뒤집는다.

 여기에 현대 기독교의 자리가 드러난다. 오늘 대부분의 신앙은 교리적 양태(때로는 종교적·규칙적 양태)로 예정과 유기 앞에 선다. 그래서 칼빈의 ‘말’은 단단히 쥐었으나, 칼빈의 ‘의도’는 놓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작정의 명제는 정확히 외우면서도, 그 명제가 데려가려던 그리스도와 경배의 자리에는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적 존재론적 독해는 칼빈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칼빈이 본래 향하던 흐름을 회복한다. 이는 비판이 아니라 교정이다. 칼빈이 사변의 미궁에서 끌어내어 그리스도라는 거울 앞에 세우려 했던 그 운동을, 말씀 → 존재 → 응답의 문법으로 다시 살려 내는 것이다. 유기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감춰진 하나님의 작정을 헤아림이 아니라, 선택의 거울이신 그리스도 앞에 서서 듣고, 살아나, 경배로 응답하는 것이다.

 

* 네 양태와 칼빈의 의도 정리

 

양태      유기를 이렇게 읽는다   칼빈의 의도와의 관계

종교적  “나는 택자인가?”를 느낌·체험으로 확인 어긋남 — 칼빈은 확신을 체험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둠

교리적  이중 예정·작정을 옳은 명제로 정의·방어            형식은 일치, 의도와는 거리 —

사변으로 굳으면 미궁

규칙적  작정을 논리로 해부하거나 수행으로 증명          어긋남 — 칼빈이 가장 강하게 경계한

호기심의 미궁

언약적  말씀→존재→응답: 그리스도 안의 선택, 경배로의 응답    가장 가까움 — 칼빈의 목회적·그리스도 중심 의도와 합치



▮참고문헌

Boman, Thorleif. Hebrew Thought Compared with Greek. Translated by Jules L. Moreau. London: SCM Press, 1960.

Calvin, Joh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ited by John T. McNeill. Translated by Ford Lewis Battles. 2 vols.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0.

Frame, John M. The Doctrine of the Word of God. A Theology of Lordship.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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