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14일
“잘 되면 제 탓, 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있다. 성공하면 자기 공을 내세우고, 실패하면 다른 사람이나 외부 요인으로 돌린다. 심지어 운명이라며 탓을 하기도 한다. 이는 합리화 정당화 명분의 지존이라 할 것이다.
세상 공기가 날카롭고 무겁다 보니 어떤 문제가 생기면 원인을 성찰하기보다는 책임 소재를 가려가며 손가락질하기에 바쁘다. 이번 지방선거를 보자니 분명 이기긴 이긴 것 같은데 진 것 같고, 분명 진 것이 확실한데 이긴 것 같은 양상이라 어리둥절하다. 정작 당사자들은 우리 실망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듯 서로 탓하며 공방한다.
인생사 다 그렇다고 치부하면 그리 못 봐줄 일은 아 니지만, 그래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개개인의 인생사를 비롯해 가정 나아가 한 국가의 흥망사를 보더라도 시대 탓, 환경 탓을 비롯해 ‘탓’할 건더기는 차고 넘친다.
그런데 탓을 하는 저변에는 철저한 ‘피해자 의식’ 이 깔려있음을 알 수 있다. 스스로 피해자라 규정하면 책임을 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무책임하고 무기력한 사람임을 스스로 광고하는 셈이다. 미국 문학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인간이란 무엇 인가》(What is Man?)에서 인간이 타인의 평판과 환경에 휘둘리는 유약한 존재임을 지적했다. 스티븐 코비(Stephen Covey)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The 7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 첫 번째 습관으로 “자신의 삶을 주도하라”(Be Proactive) 며, 사람을 환경에 휘둘리는 대응적인 사람(Reactive People)과 최악의 상황에도 주도성을 갖고 임하는 주도적인 사람(Proactive People)으로 분류해 ‘탓’의 해 로움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원망의 화살을 외부로 돌려 ‘탓’하는 순간, 삶의 주체성을 잃고 환경의 노예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탓’의 역사를 거슬러 보자면 아담 부부가 그 시초다. 인류 최초로 범죄를 저지른 후 아담은 아내를 탓했고, 심지어 아내를 주신 하나님을 탓하였다. 아담의 아내는 뱀을 탓하였다. 책임을 회피하고 원망하며 남에게 전가하는 것은 인류의 타락과 궤를 같이하는 ‘죄의 본질’이다. 우리에겐 아담의 후손으로서 어쩌면 타고난 숙명과도 같을 것이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며 엄히 꾸짖으셨다. ‘탓’을 하려거든 주 안에서 ‘자기 탓’을 해야 한다. 이는 우울감에 빠지는 소모적인 자책이 아니라, 정직하고 솔직한 성찰이며 온전한 회개로 나아가는 길이다.
《맹자》(孟子)에는 ‘반구저기’(反求諸己)라는 말이 나온다. 활이 과녁을 비껴갔을 때 과녁이나 바람을 탓하지 않고, 자기 마음과 자세를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삶의 과녁이 어긋나고 어떤 역경을 만났을 때 지녀야 할 마땅한 자세다.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랴? 멀리 갈 것도 없이 형들에게 팔려 극단적인 불행을 겪으면서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섭리에 기댄 요셉을 본으로 삼아야 한다.
거친 풍랑을 만나 바다를 탓한들 배가 앞으로 가겠는가? 아무리 세상을 탓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원망의 소음을 끄고 심연(深淵)을 울리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자. 내 눈의 들보를 먼저 보고 남 탓을 멈출 때 비로소 역동적인 삶으로 변모할 것이다.
총회 합동 이후 10개월째다. 난관도 있었으나 비교적 잘 소화하였다. 곧 111회기 총회를 준비하고 치러내야 한다. 과정에 어려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항상 끝은 ‘내 탓이요. 내가 부족했습니다.’라고 해야 한다. 언제나 손을 모으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마음을 다해 서로 아끼며 사랑해야 한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 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 5: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