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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성경으로 보는 왕과 사는 남자”

고천일 목사 (새길교회)

2026년 4월 12일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마 27:57~60)

 

 요즘 “왕과 사는 남자”라는 영화가 1,400만 명이 넘는 관객으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동안 단종을 주제로 발표된 소설이나 영화는 주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단종을 영월에 유배시켰다가 사약을 내려 죽게 한 세조의 악함을 부각하며 어린 왕이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 슬픈 역사를 그려낸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춘원 이광수의 소설 《단종 애사(哀史)》를 비롯하여 어린 임금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다 목숨을 바친 사육신(死六臣)의 충성스러움을 그려낸 작품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왕과 사는 남자’라는 영화는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난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른 ‘엄흥도’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목숨을 건 충성심이 아니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용감한 면면을 보여주면서 단종의 슬픈 사연과 함께 그의 충절(忠節)을 기립니다. 그래서 보는 사람들의 심금(心琴)을 울린다고 합니다.

 1457년 지금으로부터 569년 전, 세 아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단종의 장례를 치른 엄흥도와 가족들은 후환이 두려워 남들 몰래 고향을 등지고 정처도 없이 떠나서 어디로 가서 사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서 숙종 때 단종의 위(位)가 복위되고서야 엄홍도의 충절을 기리며 그의 후손들을 찾게 되었고 현종 10년에 송시열의 상소로 엄흥도의 후손이 처음으로 조정에 등용되었다고 합니다. 숙종 24년에는 사육신과 함께 엄흥도가 영월 창절사(彰節祠)에 배양되고 400년이 지난 고종 13년에 충의공(忠懿公)이라는 조선 최고의 시호를 받았습니다.

 현시대는 개인주의화 된 사고와 이기적인 가치관이 지배적이라서 조금이라도 위험이 따르거나 자신에게 직접적인 유익이 없으면 나서지 않고 방관하는 세태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남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을 만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서로가 치열하게 살아가느라 각박한 세상인심은 의리를 지키거나 이타적(利他的)인 삶을 사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적인 상황에서 충절을 지킨 사람의 행적을 역사 속에서 재조명하여 세상과 자기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한 것은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심정에 울림을 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보다도 훨씬 더 깊은 의미가 담긴 것을 성경 역사에서 조명해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힌 십자가의 죽음과 그 이면에 있었던 사람들이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면서 믿음의 본질적인 의미까지도 생각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 빌라도를 찾아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달라고 요구하여, 허락을 받고는 자기 집안사람들을 동원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채 매달린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어 정성껏 수습합니다. 자기가 죽으면 들어가려고 미리 준비해 놓았던 새 무덤에 예수님을 모십니다.

 이때 또 한 사람, 공회 의원 니고데모가 준비한 침향 백 근을 가져와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장례를 치릅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읽고 아는 정도로 지나치지만, 사실 이 사건을 전개해 보면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행한 믿음과 헌신에 대하여 깊이 묵상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요19:38)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일찍이 예수님의 행하시는 일과 말씀을 들으며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예수의 제자로 소개합니다. 그런데 그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숨겼습니다. 그의 두려움은 불안한 정도가 아니라 극심한 두려움 또는 공포를 뜻합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는 예수님을 따른다는 내색을 하지 않고 은밀하게 믿었다는 말입니다.

 개역 한글 성경에는 이 구절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 하더니”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한문 은휘(隱諱)는 ‘꺼리어 감추거나 숨김“이라는 의미로서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당장 닥칠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공회원(公會員)이라는 정치적인 지위의 박탈과 유대인 공동체에서 출교당하여 사실상 사회적으로 매장 당하는 최악의 상황에 몰릴 것이 뻔했습니다.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의 생존과 안위를 생각하여 고민하며 처신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자기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깨닫고는 자신의 모두를 버릴 각오로 분연(奮然)히 일어나 담대하게 총독 빌라도를 찾아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예수님의 처형 현장에 있었던 백부장을 불러서 예수님이 운명하셨는지를 확인하고 아리마대 요셉의 요청을 들어줍니다(막15:42~47). 이 상황을 보면 빌라도가 아리마대 요셉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 그가 공회원으로서 정치력과 사회적인 지위를 지닌 신뢰할 만한 존재라 인정해 쉽지 않은 절차를 생략하고 그의 요구를 들어준 것으로 보입니다(요 19:38).

 또 한 사람 니고데모는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요 19:39)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에 관하여 질문할 때 예수님은 거듭남에 관한 말씀을 해 주신 과거를 말씀하시면서, 십자가의 증인들 가운데 공회원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의 신빙성을 더하고 있음을 봅니다.

 니고데모는 몰약과 침향 섞인 것 100근(약 32.7kg)을 가져와서 예수님의 장례를 왕의 장례에 버금가는 양을 드려 헌신합니다. 또한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 지냈습니다. 그 무덤은 그리스도 부활의 영광을 나타내는 역사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아리마대 요셉을 존경받는 공회원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나 니고데모를 보면 평소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게 처신하다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한 공회의 결정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주목할 사실이 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달려 돌아가신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리고 수습하여 장사 지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높이 세워진 십자가에 달린 시신을 내리려면 긴 사다리를 양쪽에 걸쳐 놓고 밧줄을 사방으로 걸어 사람들이 붙잡아야 합니다. 돌과 흙으로 단단하게 다져놓은 구덩이를 다시 파내고 십자가를 조심조심 눕혀서 예수님의 머리에 박혀 고통스럽게 한 가시관을 제거하고, 양손과 두 발의 뼈를 관통해 단단하게 박힌 철제 대못을 뽑아야 합니다. 그야말로 노심초사하며 예수님의 몸이 상하지 않도록 얼마나 조심스럽게 감당했겠습니까.

 그렇게 수습한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으로 옮기고 그 몸을 깨끗하게 씻어드린 후에 침향을 바르고 세마포로 싸서 안치해야 했습니다.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까지 마쳐야 하는 촉박한 시간에 얼마나 많은 수고와 노력이 있었을지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이 한 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여 돌아가심이 결코 수치와 실패로 끝남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부활의 영광스러움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산 소망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일어난 구원의 역사입니다. 이 확증을 세상을 향하여 분명하게 드러내는 소명을 완수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새겨 볼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시기에는 예수님을 배반하거나 떠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제자들마저 다 도망갔습니다. 겨우 여자 몇 명만 끝까지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 때 그 누구도 나서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장례를 도맡아 해냄으로써 남들이 하지 못할 중대한 일을 결정적으로 감당해 내는 헌신과 믿음을 확증한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조심해야 할 중요한 요건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난 역사에 있었던 단종의 애처로운 죽음을 애도하고, 그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른 이름 없는 한 사람을 수백 년이 지난 이때 영화로 만들어서 보게 함으로, 인간적인 동정과 감성을 자극하여 지난 역사를 되새기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구원의 은총을 입은 복된 심령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행하실 구원의 역사를 알리셨습니다(사 53:6~9).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린양으로 제각각 사망의 길로 가던 우리의 죄를 다 도맡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무덤에 장사 되어 들어가셨다가 부활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역사와 은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경륜을 펼치시는 섭리 가운데 이루셨습니다. 심지어 무덤을 예비한 부자와 함께할 것도 선지자를 통하여 미리 밝혀놓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말씀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으며 또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살기를 힘쓰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본분입니다. 따라서 우리 구원받은 믿음의 사람들이 품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감사를 과연 어떻게 표현하며 신앙을 지켜가고 있는지를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세상의 왕이 아니라 영원하신 왕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딤전 1:17). 사람마다 다르게 품고 있는 믿음의 기준을 그리스도의 진리인 복음의 능력으로 바르게 정립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높여드리며 이기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시 47:7).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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