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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오후 5시의 부름

박루카스 선교사 (복음의 빛 교회, 독일 포츠담)

2026년 4월 12일

사역의 열정보다 깊은 “구원의 은혜”


마태복음 20장에는 우리의 상식을 깨뜨리는 포도원 주인이 등장합니다. 모두가 퇴근을 준비할 시간인 오후 5시(제11시), 주인은 장터에서 아무도 불러주지 않아 서성이는 이들을 포도원으로 들여보냅니다.

 오늘날 목회와 선교의 현장에도 스스로 ‘오후 5시의 품꾼’이라 고백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부름을 받았다는 미안함과 조급함에, 남은 인생을 전력 질주하듯 사역 현장에 쏟아붓는 분들의 열정은 분명 고귀합니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의 지상 대명령을 생명처럼 붙들고 달리는 그 헌신은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뜨거운 열심 너머에서 주님의 '진짜 마음'을 읽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1. 부르심은 고용이 아닌 자비의 사건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20장에 나타난 '제11시(오후 5시)'라는 시간에 주목해야 합니다. 유대인의 시간 계산법으로 하루의 노동이 끝나는 시간은 오후 6시입니다. 즉, 5시는 퇴근을 불과 한 시간 앞둔 시점입니다.

 헬라어 본문은 이때 장터에 남겨진 자들의 상태를 ‘아르고스(ἀργός)’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단순히 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거리가 없어 무익하고 쓸모없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당시 유대의 품꾼들은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데나리온의 인생’들이었습니다. 5시까지 선택받지 못했다는 것은 그날 가족 전체가 굶어야 한다는 공포를 뜻합니다. 주인이 그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라고 물었을 때, 그들의 대답은 절박했습니다.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여기서 '쓰는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스토오(μισθόω)’는 ‘대가를 지불하고 고용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이들은 노동 시장에서 철저히 소외되어 가치를 증명하지 못한 ‘실패자’들이었습니다.

 주인은 이들을 향해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고 명합니다. 경영학적으로 볼 때, 한 시간 뒤면 해가 지고 일을 멈춰야 하는데 새로운 인력을 투입하는 것은 지극히 비효율적인 결정입니다. 주인은 노동력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빈손과 절망을 보았기에 그들을 포도원이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으로 밀어 넣은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신학자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는 이 비유의 핵심이 노동의 대가가 아닌 ‘주인의 가눌 길 없는 관대함’에 있다고 분석합니다. 주인이 그들을 부른 것은 포도원의 일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빈손으로 돌아가 굶주릴 것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성경 해석가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 또한 이 부르심을 ‘일하기 위한 고용(Employment)’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초청(Invitation)’으로 정의합니다.

 주님이 오늘날 사역자들을 부르신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노동력’이 탐나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사역이라는 통로를 통해 우리를 ‘주님의 통치(포도원)’ 안으로 안전하게 들여보내 구원의 기쁨을 완성하시려는 것, 그것이 부르심의 본질입니다.

 

2. 삯은 성과가 아닌 약속의 실현입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은 이 비유를 통해 ‘인간의 공로’가 하나님의 ‘은혜’를 대체하려는 위험을 경고했습니다. 칼빈이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구원의 시작과 끝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달려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삯이 노동 시간에 비례했다면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인간이 청구할 수 있는 권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칼빈은 5시에 온 품꾼이 받은 한 데나리온이 한 시간 치 임금이 아니라, 한 가정이 하루를 살아낼 수 있는 최소한의 생계비이자 주인의 주권적인 ‘선물’임을 강조하며, 구원이 결코 우리의 행위로 쟁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신학자 레온 모리스(Leon Morris) 역시 구원이란 결코 인간의 노동량에 비례하는 임금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는 성경의 ‘은혜’라는 단어가 세상의 ‘거래’ 방식과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시장 논리에서는 ‘더 많이 일한 자가 더 받는 것’이 공정이지만, 하늘의 논리에서는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호의’가 공정입니다. 모리스는 만약 구원이 노동의 대가였다면, 늦게 부름을 받은 자들은 영원히 그 자격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목회와 선교 현장에서 흔히 빠지는 함정은 ‘얼마나 많은 성과를 냈는가’를 따지는 계산기 신앙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사역 기간이나 결과로 우리를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1시간을 일했든 10시간을 일했든, 주님은 당신의 자녀에게 ‘구원’이라는 동일하고도 온전한 전부를 주십니다. 우리가 쏟는 열정은 이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미 허락된 구원에 대한 감격적 반응일 뿐입니다.

 사실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 우리는 종종 잊고 살아갑니다. 그 압도적인 크기를 실감하기 위해 두 가지 비유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먼저, 어떤 사람이 1,000조 원이라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파산 직전에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평생을 노예로 살아도 0.001%도 갚지 못할 절망적인 빚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 빚을 전액 탕감해 주고, 평생 마르지 않는 은행 계좌까지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죄의 빚을 해결하신 구원의 실체입니다.

 또한 존 파이퍼나 찰스 스펄전 같은 신학자들은 이런 비유를 들곤 합니다. 거친 풍랑이 이는 바다 한가운데 배가 침몰하여 당신이 가라앉고 있습니다. 폐에 물이 차오르고 의식이 희미해질 때, 구조 헬기에서 내려온 구조대원이 당신을 꽉 붙잡아 헬기 안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죽음의 바다에서 우리를 건져 올려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게 하신 구원의 현장입니다.

 주님은 육체의 가시로 괴로워하던 사도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선언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받은 구원의 가치가 이토록 압도적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겪는 육체의 가시는 그 거대한 탕감에 비하면 ‘점심 한 끼 굶는 배고픔’ 정도의 사소한 불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미 안전한 헬기(그리스도의 품) 안에 있음을 확신했기에, 헬기가 흔들리는 기체의 진동(육체의 고통) 정도는 구원의 감격을 방해할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3. 사역은 나를 증명하는 '짐'이 아니라, 주님과 걷는 '쉼'입니다

 늦게 부름 받았다는 조급함은 때로 사역자들을 율법적인 열심으로 몰아 넣어 영혼을 메마르게 합니다. 그러나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가 강조했듯,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은 인간의 어떠한 조건이나 공로에 근거하지 않는 ‘절대적인 주권적 은혜’입니다.

 주님이 나를 부르신 진짜 이유가 나의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그 은혜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함'임을 깨닫는 순간, 사역은 나를 증명해야 하는 '짐'이 아니라 주님과 동행하는 ‘쉼’이 됩니다.

 이에 대해 존 파이퍼(John Piper) 목사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일갈합니다. “하나님은 일손이 부족해서 우리를 고용하시는 ‘고용주’가 아니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심으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후원자’이십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 안에서 만족을 누릴 때 가장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역자가 일궈낸 사역의 수치보다, 주님과 함께 포도원을 거니는 ‘그 사람 자체’를 더 기뻐하십니다. 오후 5시의 부름은 “남들보다 늦었으니 빨리 가서 성과를 내라”는 독촉이 아니라, “이제 내 안에서 안심하라”는 자비로운 품 안으로의 초대입니다.

 

4. 지상명령의 본질: '수행'을 넘어 '성삼위 하나님과의 교제'로

 많은 사역자가 평생의 사명으로 붙들고 계신 마태복음 28장 19~20절의 지상 대명령을 지탱하는 거대한 뿌리는 “가서 제자 삼으라”는 수행적 명령 이전에, 20절 하반절에 흐르는 약속, 곧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선언에 있습니다.

 신학적 관점에서 이 '함께하심'은 사역의 수단이 아니라 구원 그 자체이자 최종적인 목적입니다.

 헤르만 바빙크는 구원의 목적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가 그분과 사귀는 상태로 회복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우리를 사역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충만한 복락에 우리를 참여시키기 위해 우리를 포도원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청교도의 황태자’ 존 오웬 역시 “우리의 모든 사역과 구원의 최종 목적은 성삼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 있다”고 단언합니다.

 이들의 통찰에 따르면, 사역지(포도원)는 우리가 무언가를 해드려야 하는 고된 일터가 아니라, 성부·성자·성령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함께 먹고 마시는’ 영광스러운 사귐의 현장입니다.

 따라서 오후 5시에 부름받은 이들에게 지상명령은 열매를 맺으라는 압박이 아닙니다. 오히려 “네가 사역의 현장 어디에 있든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이미 내 안에서 안전하고 온전하다”는 임마누엘 구원의 확증입니다.

 

 ■ 나가는 글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칼럼은 결코 사명의 현장을 떠나라는 초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역의 고단함에 매몰되어 자칫 놓칠 수 있었던 ‘복음의 감격’을 회복하여, 그 힘으로 다시 일어서라는 격려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그 크기는 우리의 상상으로 다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일 아침 사형을 기다리던 죄수에게 왕의 사면장이 전달되고, 그를 왕궁으로 데려가 왕자로 삼아준 것과 같습니다. 이 거대한 신분의 변화를 경험한 왕자가, 감옥의 침대가 좀 딱딱했다고 해서 왕궁의 잔치를 거부하겠습니까? 헬기에 구조되어 생명을 얻은 자가 기체의 진동이 시끄럽다고 구조대원을 원망하겠습니까?

 오후 5시의 품꾼이 남은 한 시간 동안 누구보다 뜨겁게 일했던 것은, 더 많은 보상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자신 같은 사람을 불러준 주인의 배려가 너무나 고마워서 터져 나온 사랑의 반응이었습니다.

 

 사역의 현장에서 땀 흘리시는 선교사님! 주님은 당신의 ‘사역’보다 당신의 ‘존재’를 더 사랑하십니다. 선교지와 목양지에서 눈에 보이는 위대한 성취를 이루지 못해도, 주님은 이미 당신에게 ‘한 데나리온’이라는 온전한 구원을 주셨습니다.

 당신은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 하는 일꾼이기 전에, 주님이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하기로 약속하신 가장 귀한 친구이자 자녀입니다. 그 임마누엘의 은혜 안에서, 오늘 하루도 사명의 ‘짐’ 대신 구원의 ‘감격’으로 걸어가시길 응원합니다. 당신은 주님이 맺으신 가장 귀한 열매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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