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학 목사 (천안아산우리교회)
2026년 1월 19일
“헬라·라틴 언어관의 변질과 신학의 왜곡(1)”

1, 언어가 사유로 바뀔 때 — 존재의 대상화히브리적 세계에서 ‘말씀( דָבָר ,dābār)’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존재를 일으키는 발화적 사건이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의 의지와 행위가 현실에 드러나는 생명의 운동이었으며, 언어는 존재를 새롭게 하고 관계를 세우는 언약적 통로였다. 그러나 헬라 철학 세계에 진입하면서 언어는 사건이 아니라 사유의 도구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플라톤은 언어를 “보이지 않는 이데아를 가리키는 그림자”로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어를 “사물의 본질을 분류하는 표지”로 규정했다. 이 순간 일어난 변화는 단순한 철학적 수정이 아니라, 언어의 본질이 발화에서 기호로 전환되는 근본적 사건이었다.
▸ 언약적 언어(발화) → 헬라적 언어(기호)
히브리적 관점에서 언어는 하나님과 피조물을 잇고, 존재를 드러내고, 정체성을 일으키는 관계적 발화였다. 그러나 헬라적 해석이 들어오면서 언어는 존재를 새롭게 만드는 발화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대상을 설명하기 위한 기호 체계가 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언어가 변질된 것이 아니라, 언어가 무엇을 반영하느냐가 바뀐 것이다. 언약적 언어는 하나님의 발화를 반영하여 존재를 일으키는 생명 언어였지만, 헬라적 언어는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사물을 해석하는 지식 언어로 바뀌었다.
언어가 기호로 축소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더 이상 존재를 세우는 실재가 아니라, “이성이 해석해야 할 자료”처럼 취급되기 시작했다. 언어는 관계를 묶는 통로에서 떨어져 개념을 분류하고 설명하는 도구가 되었고 하나님 말씀은 이성의 판단 아래 놓이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이것이 바로 ‘언어의 비언약화(非言約化)’이다.
▸ 로고스 의 성육신 — 언약 언어의 회복 사건
요한복음 1:1–14에서 “로고스가 육신이 되셨다”는 선언은 헬라적 로고스를 확증한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언약적 언어(dābār)의 회복을 나타내는 사건이다. 어거스틴이 “verbum mentis”(De Trinitate IX.7)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이성이 만들어낸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내적 발화이며, 존재를 일으키는 실재적 행위이다. 그러나 언어가 헬라적 기호 체계속으로 들어간 이후, 이 언약적 실재성은 점차 사라지고, 언어는 단지 이미 존재하는 것을 기술하는 비생명적 형태로 축소되었다.
2. 라틴 신학의 법정적 언어 — “말씀의 사법화” 헬라 사유가 교회 안에 들어오자, 라틴신학은 이를 체계화하여 법적 언어로 신
학을 조직했다. ‘은혜(gratia)’는 법적 호의, ‘죄(reatus)’는 법적 상태, ‘의(justitia)’는 형식적 판결이 되었다. 말씀은 관계적 사건이 아니라 명제적 진리, 곧 선언문으로 취급되었다.
이 언어 구조에서는 언약이 관계가 아니라 계약(contractus) 으로 바뀌었다. 하나님과 인간은 법적 약속의 당사자로 간주되었고, 신앙은 존재의 변화가 아니라 계약의 조건 이행으로 축소되었다. 스콜라 신학은 이렇게 ‘언어를 법으로 환원한 신학’이었다. 하나님의 발화는 법정의 선고처럼 이해되었고, 말씀의 내면화는 법적 ‘전가’(imputatio) 로 대체되었다.
3. 스콜라 언어의 특징 — 개념으로 하나님을 설명하려는 시도
스콜라주의의 중심 문제는 언어를 본질의 개념화 도구로 삼았다는 데 있다. 신학은 ‘정의와 구분’을 통해 신비를 설명하려 했고, 하나님의 존재는 인간의 사유 구조 안에 포섭되었다. 이런 언어는 창조적 발화가 아니라 논리적 분류체계이다. “하나님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이미 히브리적 세계관에서는 불가능한 질문이었다. 히브리 세계에서 하나님은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스콜라 언어는 하나님을 존재의 최고 원인으로 설정했고, ‘말씀하심’은 ‘본질의 속성’으로 전락했다.
결과적으로, 신학 언어는 하나님을 살아 있는 관계 속에서가 아니라, 개념적 틀 안에서 이해하려는 철학적 언어가 되었다. 이때부터 신학은 존재의 사건이 아니라, 신적 실체의 논리적 구조를 해명하는 학문으로 바뀌었다.
4. 칼빈의 개입 — 스콜라 언어를 통한 언약적 실재의 회복 시도
칼빈은 중세 말 스콜라주의가 언어를 개념적 기호로 축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분류·정의·논증의 도구로 삼아버린 철학적 틀에 깊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성(reason)이 가진 기능을 인정했으나,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군림하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기독교강요』 I.5.9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인간의 사유가 아니라, 성령의 조명에 의한 것이다.”
이 말은 단순한 신비주의가 아니라, 인식의 주체가 인간에서 하나님으로 이동하는 언약적 인식론의 회복 시도였다. 그러나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철저히 반(反)이성주의로 기울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스콜라적 언어를 전략적으로 사용하며, 그 언어의 내부 구조를 재해석하여 히브리적 언약 실재를 다시 숨쉬게 하려 했다.
1) verbum Dei를 ‘개념’이 아닌 ‘현현’으로 다시 정의하다
스콜라주의는 verbum Dei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의 명제, 신학적 정의, 교리적 체계 등으로 환원하였다. 그러나 칼빈에게서 verbum Dei는 단순히 “하나님이 하신 말”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현존하는 방식, 즉 관계적 발화의 실체이다. 언약적 존재론의 관점에서 보면, 칼빈은 verbum Dei를 “하나님의 비가시적 의지가 가시적 실체로 현현하는 사건”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칼빈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존재를 부르는 발화, 정체성을 빚는 행위, 언약적 관계를 여는 생명, 하나님 자신의 자기 드러남이었다. 이는 히브리어 dābār(말/사건/현현) 개념과 결정적으로 가깝다.
2) 예정론: ‘작정(decretum)’이 아니라 ‘발화(event)’
스콜라주의는 예정(praedestinatio)을 “시간 이전의 결정(決定)”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칼빈에게 예정은 “하나님의 의지가 발화되고, 실행되고, 존재를 빚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는 예정론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순간 존재가 일어난다. 하나님 안에서는 ‘결정’과 ‘실행’이 분리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은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에서 발화되는 동일한 사건이다. 언약적 존재론과 일치하는 지점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스콜라적 개념이 아니라, 발화적 사건이다. 칼빈은 이런 관점을 스콜라적 언어를 사용해 서술했지만, 그 의미는 히브리적 언약 존재론에 훨씬 가까웠다.
3) 스콜라 언어 안에서 히브리적 실재를 숨쉬게 하다
칼빈은 그의 시대적 한계 안에서 스콜라주의가 지배하던 언어틀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언어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안에서부터 재정의·재배치·재구성하여 히브리적 세계관을 다시살아 움직이게 했다.
예를 들면: substantia(본질)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하나님의 본질을 관계적 현존으로 이해한다. decretum Dei(하나님의 작정)를 사용하지만, 그것을 “영원한 기계적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발화되는 언약의 사건으로 읽는다.
cognitio Dei(하나님을 아는 지식)를 사용하지만, 그것을 성령의 조명으로 일어나는 존재의 변화로 해석한다. 즉, 칼빈은 스콜라 언어라는 껍질을 유지하면서 그 내부 의미를 히브리적-언약적 발화구조로 바꾸었다.
4) 결론: 칼빈은 스콜라 구조 속에서 히브리적 언어를 되살린 인물 칼빈은 스콜라주의를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으나, 그 안에서 언어의 본질, 인식의 구조, 예정의 의미,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모두 발화적·언약적·존재론적 방식으로 다시 구성했다.
그래서 칼빈의 신학은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다:
“칼빈은 스콜라주의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그 언어 안에 히브리적 발화의 생명을 다시 불어넣은 개혁자였다.”
이는 언약적 존재론의 관점에서 볼 때, 칼빈이야말로 ‘로고스-개념’을 ‘다바르-발화’로 되돌린 최초의 개혁자였음을 보여준다.
5. 개혁파 스콜라의 왜곡 — 관계없는 신학의 귀결
칼빈은 스콜라 언어를 도구로 삼아 그 의미를 히브리적 발화 실재로 재배치하는 독특한 시도를 했으나, 그의 후대는 이 작업을 이어가지 못했다. 특히 17세기 개혁파 스콜라 신학은 칼빈이 되살려 놓은 ‘관계적 실재 언어’를 다시 ‘법정적·논증적 체계’로 되돌려 놓았다. 즉, 칼빈이 회복했던 “말씀의 사건성(발화)”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의지의 논리적 구조”만 남았다.
베자(Vasa) 튜레틴(Francis Turretin), 고마루스(Gomarus), 보이스(William Ames) 등 대표적 정통파 스콜라 신학자
들은 예정론을 다음과 같이 재정의하였다:
말씀의 발 화 → 신적 의지의 결정, 존재의 생성 사건 → 논리적 순서의 배열, 언약적 관계 → 법정적 자격의 분류, 성령의 조명 사건 → 지성의 확정, 하나님 의 현현 → 신적 속성의 체계적 분류 칼빈에게서 decretum Dei (하나님의 작정)는 “말씀의 발화와 존재의 실현이 하나의 사건으로 드러나는 자리”였으나, 개혁파 스콜라에게서 그것은 “시간 이전에 논리적으로 배열된 의지의 결정 목록”이 되었다. 이 변화는 단순한 해석의 차이가 아니라, 신학의 존재론 자체를 바꾸어버린 전환이었다.
① 하나님은 발화자가 아니라 결정자로 변한다
칼빈에게서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 곧 존재를 일으키는 관계적 발화의 원천이셨다. 그러나 개혁파 스콜라에게서 하나님은 “결정 사항을 논리적으로 배열하는 주권적 이성(mensa Dei)” 즉 “최고의 논리적 주체”로 재해석된다. 이때 하나님은 더 이상 말씀으로 존재를 일으키는 분이 아니라, “결정을 내려 인간을 분류하시는 분”으로 축소된다.
② 인간은 언약의 응답자가 아니라, 피선택자의 지위로 축소된다
칼빈은 인간 존재를 “하나님의 발화에 응답하여 존재를 드러내는 자”로 보았다. 그러나 스콜라 신학은 인간을 “신적 결정 아래 논리적으로 분류된 수동적 객체”로 이해했다. 그 결과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의 발화를 듣는 자리, 관계적으로 응답하는 자리, 말씀 안에서 정체성이 빚어지는 자리를 잃어버리고, 단순히 “선택/유기라는 법적 지위 아래 놓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③ 언약은 관계가 아니라 ‘법적 조건체계’가 된다
스콜라주의는 언약을 “법적 조항” 또는 “계약적 조건”으로 읽었다. 언약은 더이상 하나님–인간 사이의 관계적 발화의 통로가 아니라, “따르면 복, 어기면 벌”이라는 법적 계약으로 환원되었다. 그 결과 언약은 “말씀과 존재를 잇는 관계적 구조”라는 본래 의미를 잃었다.
④ 스콜라적 예정 체계의 최종 귀결 — ‘비언약적 신학’
개혁파 스콜라주의는 다음과 같은 구조를 남겼다: 하나님: 결정하는 이성적 존재, 인간: 분류되는 개념적 존재, 말씀: 명제의 집합, 언약: 법적 계약, 성령: 판단을 확증하는 지성의 조력자, 예정: 결정 목록
이는 히브리적 언약 언어의 반대편에 위치한다. 히브리적 언어에서 말씀(dābār)은 발생·사건·현현이지만, 스콜라적 언어에서는 말씀은 표상·개념·정의가 된다. 결국 스콜라주의는 칼빈의 신학을 “체계화”하려 했지만, 그 체계화 과정에서 칼빈이 되살렸던 발화의 생명, 언약의 관계성, 성령의 내적 사건성을 대부분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개혁신학은 ‘살아 있는 말씀의 신학’이 아니라 ‘논리적 예정 체계’로 축소되는 위기에 직면했다.
⑤ 언약적 존재론의 평가
언약적 존재론 관점에서 보면, 개혁파 스콜라의 문제는 단순히 “해석의 오류”가 아니라 언어 구조와 존재론의 붕괴이다. 말씀의 사건성이 사라졌고, 존재의 관계성이 사라졌으며, 성령의 내면화가 사라졌고, 인간의 응답성이 사라졌다. 결국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발화적 언약구조가 사라지고, “비언약적 신학”만 남은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