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기고> 성경적 언어 세계관(6)

구성학 목사 (천안아산우리교회)

2025년 12월 27일

“라틴어 세계관, 성경을 점령하다”


■ 종교개혁 508년, 그러나 여전히 미완의 개혁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한 이래 508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은 과연 완성되었는가? 성경은 회복되었으나, 성경의 언어 세계관까지 회복되었는가?

오늘날 한국교회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은 단순히 윤리적 타락이나 제도적 부패만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문제는 우리가 성경을 읽되, 성경이 말하는 방식으로 읽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히브리적 생명의 언어를 라틴적 논리의 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으로 돌아가되, 성경의 세계관으로는 돌아가지 못한” 오늘 교회의 현주소입니다.


I. 언어가 세계관을 결정한다

<히브리 언어: 존재를 일으키는 사건>

히브리적 세계관에서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언어는 곧 실재를 창조하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 1:3), 그분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매 그는 민족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창12:1-3).

이것을 우리는 언약적 실제론(Covenantal Realism)’이라 부릅니다. 언약(berith)은 단순한 계약서(contract)가 아니라, 하나님의 발화 그 자체가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는 사건입니다. “너는 내 백성이라”라는 선언은 정보 전달이 아니라, 그 선언으로 인해 실제로 백성이 되는 존재론적 변화를 의미합니다. 

율법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율법은 외부에서 주어진 규범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분의 백성이 살아야 할 방식을 제시하는 살아있는 지침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음에 새겨져 생각을 일으키고, 그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존재의 변화였습니다(신 6:6, 렘 31:33).


<바울의 복음: 내면화된 율법의 역동성>

사도 바울이 “복음으로 말미암은 믿음의 의”를 말할 때, 히브리적 세계관 위에서 있었습니다. 로마서 10장 8~10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은 외부의 법이 아니라 내면에 새겨진 존재의 변화로 드러난다”고 선포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교리적 해석을 넘어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복음에 내면화되고, 그 복음이 믿는 자에게 내면화되어 믿음과 고백을 실현하는 구조입니다(롬 6:17, 10:13-17, 고후 3:3). 말씀이 존재 안으로 침투하여 생명과 행위를 일으키는 것, 이것이 바울이 이해한 복음의 본질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에게 율법은 폐기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성령 안에서 내면화되어 존재 안에서 실현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의 기능과 역할이 재정의되어, 복음 안에서 내면화된 삶의 방향성으로 전환된 것입니다.


II. 라틴 세계관의 침투: 언약에서 법으로

313년 밀라노 칙령 이후, 기독교는 단순히 공인된 것이 아니라 로마의 언어체계 속으로 흡수되었습니다. 이것은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세계관의 근본적 전환이었습니다. 로마의 라틴어는 헬라어와 달리 사유의 언어가 아니라 통제의 언어, 법의 언어, 제도화된 언어였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더 이상 살아있는 하나님의 발화가 아니라 기록된 법문으로 취급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조직은 로마의 행정 구조를 본뜬 성직 제도(hierarchy)로 변했고, ‘말씀의 공동체’였던 교회는 ‘법의 기관’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히브리적 언약의 중심이었던 “하나님과 백성의 대

화”는 라틴적 법질서 아래 “교회와 신자의 위계적 관계”로 대체되었습니다. 이 순간, 언어는 신앙의 실재가 아니라 권위의 매개 수단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세계관을 뿌리째 흔든 구조적 변화의 시작이었습니다.


III. 어거스틴: 라틴적 언어철학의 신학화

어거스틴(c. 354~430)은 이 전환의 결정적 인물입니다. 그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수용하여, 진리를 외부 세계가 아닌 영혼의 내면에서 발견되는 빛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내면보다 더 내면적이시다”(interior intimo meo)- 이 유명한 고백은 아름답지만, 히브리적 하나님과는 다른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적 하나님은 언약 가운데 역사 속에서 말씀하시며 임재하시는 분이시지만, 어거스틴의 하나님은 영혼 안에 반사된 빛, 내적 직관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때 진리는 말씀의 사건이 아니라 내적 직관의 질서로 전환되었고, 히브리적 실재가 ‘말씀 - 존재’라면, 어거스틴의 실재는 ‘이성 - 내면’으로, 신학의 중심이 “말씀의 역사”에서 “사유의 내면”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언어관에서 ‘signum’(표상)은 실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지시하는 기호입니다. 이것은 언어가 존재를 일으키는 실체에서 사유를 표현하는 도구로 격하된 것입니다. 그 결과 성경 해석은 의미 탐구의 행위로 바뀌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언어로 번역되면서 발생한 존재적 차이는 철학적으로 봉합되었습니다.

그의 『삼위일체론(De Trinitate)』은 탁월한 신학적 업적이지만, 그 안에는 히브리적 언약의 사건성 대신 ‘라틴적 논리의 정합성’이 자리합니다. 성부 - 성자 - 성령의 관계는 언약적 동행이 아니라 논리적 관계도(logical relation)로 정리됩니다. 이로써 교회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임재”를 체험하는 공동체에서, “하나님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제도”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IV. 스콜라철학: 말씀의 생명을 논리의 체계로

11세기 이후, 어거스틴적 사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결합하여 스콜라철학(Scholastica)으로 정교화됩니다. 성경은 철학의 하위 분과로 재편하며, "신학은 이성의 여왕"이라는 표어를 내걸었습니다. 그 결과 히브리어는 ‘살아있는 행위 언어’가 아니라, 라틴어의 논리적·추상적 체계어가 되었습니다. ‘Verbum Dei’(하나님의 말씀)는 더 이상 창조의 사건이 아니라 교리의 개념어로 정리되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은혜(gratia)”를 형상적 실체(forma)로 규정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주입가능한 실체”로 전환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가톨릭 ‘은혜 주입론’(Infusio Gratiae)의 철학적 토대이며, 그 결과 성령의 생명 사건은 형이상학적 범주로 환원되었습니다. 언약적 존재론의 세계(히브리 세계관)는 사라지고, 대신 신학적 체계가 존재의 자리를 대체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더 이상 인간을 새로운 존재로 창조하는 능력이 아니라, 교회가 관리하고 분배하는 은총의 제도가 되었습니다.


V. 중세 암흑기: 말씀을 보존했으나 생명을 잃다

라틴 세계관이 교회와 성경을 완전히 점령하게 되었고 중세 교회의 암흑기를 불러왔습니다. 성경은 더 이상 백성의 언어가 아니라 사제 계층의 전유물이 되었고, 신앙은 실재적 만남이 아니라 교리적 승인으로 대체되었습니다. 말씀이 인간 안에 심겨 생명을 일으키는 사건이 아니라, 교회 권위가 부여하는 은총의 제도로 바뀌었고, 라틴어로 봉쇄된 성경은 말씀의 사건적 성격을 상실했습니다. 결국 "성경을 듣는 신앙"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신앙"으로의 전환을 초래했습니다.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는 “말씀을 보존했으나, 말씀의 생명을 잃어버린 시대”가 되었고, 성경은 있었으나 하나님의 음성은 없었으며, 성경의 능력은 사라졌고, 교리만 정교해지고 생명은 메말라갔습니다.


VI. 종교개혁의 성취와 한계

종교개혁은 성경을 민중의 언어로 돌려주려는 거룩한 운동이었습니다. 루터와 칼빈은 “오직 성경”을 외치며 교회를 말씀으로 돌려놓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해석 방법은 여전히 라틴적 논리구조에 갇혀 있었고, 루터와 칼빈은 성경으로 돌아갔지만, 그들의 변증은 스콜라적 합리성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성경의 언어는 회복되었으나 히브리적 존재론은 여전히 어두운 침묵 속에 남아 사람들의 마음에 닿지 못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요 1:14)는 진리가 다시금 “말씀이 논리로 체계화되었다”로 변환되었고, 바울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믿음의 의”를 스콜라적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 성취에 대한 전가”로 이해했으며, 바울이 말한 "율법을 존재와 관계하는 언약으로 내면화 구조"까지는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라틴 세계관은 형태를 바꾸어 개혁신학의 논리 속에 잠재하였으며, 교회는 여전히 “말씀을 말하는 자”로 남고 “말씀이 살아지는 존재”로 복귀하지 못했습니다.


VII. 결론: 진정한 개혁을 향하여

오늘날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개혁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언약적 존재론적 언어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해석의 텍스트가 아니라, 존재를 창조하고 변화시키는 살아있는 실체임을 다시 자각해야 합니다. 설교는 정보 전달이 아니라 꽃을 피우는 원동력이며, 복음이 사람의 지성에 새롭게 심어져 중생의 정체성을 새롭게 창조하는 사건이어야 하고, 성경 읽기는 의미 분석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경험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라틴어 세계관이 성경과 교회를 점령한 어두움은 결국 언어의 존재성을 상실한 신앙의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많이 알되, 성경이 우리를 아는 경험이 부족합니다. 교리는 정교하되, 생명은 메마릅니다. 헬라와 라틴 세계관으로부터 성경과 교회를 건져내어 성경이 우리 안에 복음으로 심어지고, 성경이 우리를 일하게 하여, 성경의 삶,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삶이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재현해야 합니다.


<목회 현장에서의 적용>

교회는 교리를 신뢰하고 동의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복음으로 중생한 사람들이 복음으로 삶을 사는 삶의 공동체이고 이 공동체의 머리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는 아래와 같은 대전환이 요구됩니다.

설교의 전환: 설교는 성경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성경 '그 자체'가 회중 가운데서 발화되어 중생의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 읽기의 전환: 성경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을 넘어, 성경이 우리를 읽고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창조하도록 우리를 내어드려야 합니다.

신앙교육의 전환: 교리 암기와 지식 전달이 아니라, 말씀이 마음에 새겨져 생각을 일으키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내면화 과정을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전환: 교회는 교리를 수호하는 기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언약 공동체로 회복되어야합니다.


‘성경적 언어 세계관’의 회복은 단순한 언어 문제나 주석 방법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심으로 인간을 다시 존재케 하시는 언약의 회복을 뜻합니다. 이 회복이야말로, 헬라 사상과 라틴적 교리의 껍질을 벗기고 히브리적 생명 언어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진정한 개혁(Reformatio)의 완성입니다. 종교개혁 508년이 맞이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또 다른 교리적 정교화가 아니라 말씀이 다시 육신이 되는 경험, 하나님의 발화가 우리의 존재를 새롭게 창조하는 언약의 회복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이 미처 완성하지 못한, 그러나 반드시 완성해야 할 우리 시대의 과제입니다.


<참고문헌>

Augustine, De Trinitate.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ae.

N. Lohfink, The Theology of the Pentateuch.

Gerhard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Vern Poythress,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김회권, 『히브리적 사유와 기독교』.

김재진, 『어거스틴 신학의 형이상학적 구조』.

로고(반전).png

개인정보이용방침

이용약관

우) 07582 서울시 강서구 강서로 456 센타빌딩 301호           대표전화 : 02-2238-0192           팩스 : 02-2238-0515

총회장·발행인 : 이상규             이사장 : 정은주             사장 : 정대운             주필 : 최종렬             편집국장 : 오윤정

창간일 : 1984년 10월 1일               등록일 : 2014년 12월 30일               등록번호 : 종로 라 00338 (월간)

Copylight (c) 2025. the Reformed Journal. All right reserved.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