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14일
사람 본성은 비슷하지만, 습관에 따라서 멀어진다(性相近也 習相遠也)는 말이 있다. 배우고 익힘에 따라 인격과 품성이 천양지차(天壤之差)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가장 지혜로운 사람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만이 변하지 않는다(唯上知與下愚不移)고 한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上知)은 지식이 많고 이치를 알아 어떤 경우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가장 어리석은 사람(下愚)은 어리석어 아무리 가르치고 일깨워도 절대로 변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모두 공자(孔子)의 가르침이다(論語, 陽貨篇). 둘 다 고집이
세 변할 생각이 없다는 게 공통점이다.
그런데 상지(上知), 세상 지식과 지혜는 넘치는데 이 때문에 복음을 접하고도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한다면 하우(下愚)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쇠귀에 경읽기’니 무지한 영혼이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
라”(잠 12:15)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단에 속한 사람들, 대개 긴 세월 세뇌를 당한 상태라 어떤 논리로도 설득하기 어렵다. (정통교단의 교회에서도 발견되곤 한다.) 그들의 맹신은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 판단과 분별 능력이 매우 떨어진다.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
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다(렘 5:21).
이들에겐 교주가 상지(上知)요, 하나님은 같은 존재이니 떠받들며 절대적인 진리를 설파한다고 굳게 믿는다. 어떤 오류도 없는 신성한 존재로 받들면서 스스로 하우(下愚)가 되고 만다. 목숨을 바칠 기세로 교주에게 충성을 다짐하니 하우(下愚)의 극치다. 그
러면서도 자신들을 상지(上知)로 착각한다. 교주에게 배운 교리를 절대 진리로 믿으니 다른 어떤 것도 받지 않는다. 그들의 교리가 잘못되었음을 알려주고, 증거를 내놓아도 도리어 권면하는 이들에게 잘못되었다고 한다. 자기들만이 ‘남은 자’라며 도우려는 이
들을 불쌍히 여긴다. 그러니 이들에게 “왜 빠져나오지 못하냐?”고 묻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왜곡 변질된 복음을 붙들고 있는 한 이들의 예수님은 다른 예수님이다.
지난 8월 18일 양 교단(신림, 강서)이 크게 결단하고 합동하여 하나가 되었다. 몹시 반기며 축복하는 이들도 있고,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시선이 어떠하든지 고마워해야 한다. 동기부여가 되고 자극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3월 다락방 측과 결별하면서 사과 성명을 냈고, 이번 합동 총회에서는 한국 교회 앞에 ‘보고문’도 발표하였다. 그간 일련의 개혁을 위한 자구책을 마련하고 실천해왔음을 보고하고 개혁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긴장을 늦추지 말고 꾸준히 신뢰를 구축해 나
가야만 한다. 바르고 엄격한 신학 교육 아래 새로이 정립해 나가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내부의 결속을 위해서도 함께 애써야 한다. 서로 다른 부분을 틀렸다면서 비난해서는 안 된다. 상대를 변화시키려 말고, “스스로 먼저 맞춰 변해야 한다.” 지내온 과정과 형편이 서로 다르지 않은가? 십분 이해하고 포용하면 좋겠다.
또한 바보 같은 프레임을 유통해선 안 된다.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는 《코끼리는 생각하지마》(2004)에서 ‘프레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고 있다. 어떤 정 치인이 “제가 ㅇㅇㅇ 아바타입니까?”라고 했다가 두고두고 입에 오르내린다. 온라인상에서
어떤 정보를 숨기거나 삭제하려다 오히려 관심을 끌어 도리어 널리 퍼져나가는 것을 일컫는 ‘스트라이샌드 효과’(Streisand effect)도 있다. 우리를 향해 제기하는 몇몇 의혹에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된다. 변명할수록 ‘코끼리’가 생각날 뿐이다. 사역의 열매, 삶의 열매로 보여주는 게 상책이다. 우리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기준으로 늘 점검하고 주의를 기울이면서 말이다.
결별한 것도 백번 잘한 일이고, 합동한 것도 매우 잘한 일이다. 이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 나라 확장과 진전’을 위하여 헌신할 일만 남았다. ‘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다. 할렐루야!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 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 3:5, 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