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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종님’과 ‘교복’

변이주 목사 (국문학박사, 장수알곡교회 은퇴 목사)

2025년 9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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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장수지역 교회 목회자 모임이 있었다. 그때 이웃 교회 권 목사님이, 불만이 섞인 목소리로 나에게 이런 말을했다. 내용인즉 자기 교회 권사 한 분이 기도할 때마다 담임 목사를 ‘종님’으로 표현하는데 그것이 귀에 영 거슬린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자면

“오늘도 귀하신 종님을 세우셔서 예배를 인도하게 하시고 말씀을 전하게 하셨사오니……”

이런 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담임 목사님이라든가 우리 목사님이라고 표현하면 듣기에도 좋고 표현상으로도 문제가 없을 터인데 굳이 ‘종님’이라고 할 게 뭐란 말인지……”

하면서 섭섭한 마음을 솔직히 드러내 보였다.

그 말을 들은 내가 이렇게 물었다.

“그 권사님은 진실하고 충성스러운 분이죠?”

“유치원 원장님인데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일꾼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내가 어떻게 그 권사님이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일꾼인 줄 알았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요즈음은 목사를 보고 ‘종님’이라고 하는 성도가 별로 없지요. 그런데 ‘종님’이라는 표현은 사실상 목회자를 최대한으로 존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표현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나는 김 목사님에게 내가 겪은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줬다. 그 이야기는 얼마 전 내가 쓴 책 『흰 가운 검은 가운』에 실렸는데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1. 종님(?)

좀 오래전의 일입니다. 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입니다. “종놈들이 판친다.”고 하며 격앙된 어조로 강의를 진행하는 강사가 있었습니다.

그 강사는 당시 일부 성도들이 목회자를 일컬을 때 “종님”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 무척 마음이 상한 것 같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종’이란 ‘노예’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말인데 신분상으로 최하위의 대접을 받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한 종에게 ‘님’자를 붙여서 대접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 즉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꾼들을 ‘종’ 또는 ‘종님’이라고 하는 것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생각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물론 모세나 다윗 등도 하나님의 종으로 불렸습니다. 더구나 예수께서도 ‘거룩한 종’으로 불린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행 4:27, 30).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거룩한 종’이라는 표현입니다. “종이면 종이지 거룩한 종은 또 뭐야?” 이런 반문을 예상할 수 있겠습니다만 ‘거룩한’ 대신 ‘자원한’이라는 용어로 표현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줄 압니다.

‘자원한 종’ ― 종의 신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청해서 종이 되었다는 것인데 어떤 경우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예화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어떤 선교사님이 노예시장을 지날 때 였다고 합니다. 노예로 팔려 가는 모녀가 있었는데 어머니 노예가 어린 딸을 부둥켜안고 노예 상인에게 사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제발 딸을 데려갈 수 있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노예 상인은 그 청을 거절했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선교사님은 웃돈을 얹어주고 모녀를 샀습니다. 그리고는 그 어머니 노예에게 말했습니다.

“당신 모녀를 내가 샀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을 노예로 부리지 않고 자유를 주겠습니다. 어디든지 가고 싶은 데로 가십시오. 당신들은 이제 자유의 몸입니다.”

이렇게 말한 선교사님은 그 자리에서 노예 문서를 찢어버렸습니다. 어머니 노예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아닙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저희 모녀의 주인이십니다. 어디든지 따라가서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두 모녀는 기어이 선교사님을 따라옵니다. 우거진 숲길을 지나갈 때였습니다.

갑자기 독사가 나타나 선교사님을 물어버렸습니다. 선교사님은 그만 의식을 잃은 채 쓰러지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