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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헬라어로 히브리어 세계관을 증언한 사도바울(2)

구성학 목사 (천안아산우리교회)

2025년 9월 14일

성경적 언어 세계관(4)


1. 바울의 언어 세계관으로 인한 내적 고충

토를라이프 보만(Thorleif Boman1894~1978)은 “히브리인은 듣고 순종하며, 헬라인은 보고 분석한다. 히브리어는 동사 중심, 헬라어는 명사 중심이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두 언어는 단순히 단어와 문법의 차이를 넘어, 세계를 이해하는 근본적인 관점의 차이를 드러낸다. 이는 헬라어와 히브리어 모두에 능통했던 사도 바울에게 깊은 내적 고충의 원인이 되었다.

히브리인의 언어는 ‘관계적 지향성’을 가진다. '말씀'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며 사건을 일으키는 존재인 '다바르'( רַבָד )로 인식된다.그러므로 히브리적 세계관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 일어난 결과가 아니라, 말씀이 목적하는 방향과 미래의 가능성이다.

즉, 행위의 결과가 아닌, 행위 자체의 방향성과 목표에 가치를 둔다. 예를 들어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명령은 한 번의 행위가 아니라,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아니하고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고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동사의 시제도 ‘과거, 현재, 미래’가 아닌 ‘완료’와 ‘미완료’로 나뉘며, 사건의 완료 여부와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헬라인의 언어는 ‘결과적 완결성’을 추구한다. 헬라 철학은 추상적인 개념과 논리적 구조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 했고, ‘말씀’인 ‘로고스’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항상 존재하는 절대적인 실체로 인식했다. 로고스는 이미 존재하는 완성된 형태의 진리이며, 그 활동이나 작용은 본질 자체에서 파생된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관점에서는 결과(본질)가 과정(활동)보다 선행하고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동사의 시제와 문법 또한 사건의 ‘완료’나 ‘결과’를 명확히 구분하는 데 중점을 둔다.

바울은 이 두 언어 세계관의 충돌 속에서, 복음을 전달하는 도전을 마주하게 되었다.


바울은 히브리적 언어로 말씀이 곧 ‘살아있는 생명(하임)’이자 ‘능동적인 사건( רָבָּד 다바르)’임을 깨달았지만, 그가 복음을 전해야 할 헬라인들은 로고스를 ‘고정된 진리’로만 이해했다. 이러한 언어적 간극은 바울에게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헬라인들에게 이해시키는 고된 과제였다.

헬라 철학의 추상성과 논리성을 사용하면서도, 히브리적 말씀의 역동성과 관계성을 놓치지 않아야 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을 단순히 ‘지식적 동의’(피스티스)가 아닌,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 הנומא 에무나)'로 설명하는 것, 그리스도를 통해 '의'가 단지 도덕적 완결성이 아닌 '관계의 회복‘( קֶדֶ֫צ 체데크 /하나님과 동행)'으로 주어진다고 선포하는 것은 이러한 고충의 흔

적이다.


궁극적으로, 바울의 내적 고충은 그의 서신들에서 복음이 단순히 논리적 교리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는 '관계적 사건'임을 증언하는 통로였고,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언약'의 역동성을 증거하며, 세계관이 다른 언어를 조화시켜 의미를 전달하는데, 매우 심혈을 기울인 모습이 드러난다. 바울은 가끔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긴 문장을 작성해야 했고, 서로 다른 의미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철저한 예증을 사용하여 의미를 이해시키려 했다.

그 대표적인 언어들이 말씀, 믿음, 의, 영과 육 등이고, 이중에 “영과 육”은 바울 자신도 설명하기 매우 어려운 난제들이었고, 단순한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말씀을 존재이자 활동으로 보는 히브리적 구조’와, ‘존재와 활동을 분리하려는 헬라적 구조’ 사이의 깊은충돌을 넘나드는 작업이었다. 이 주제는 사도 시대가 끝나고 교회가 헬라문화권으로 확산되면서, 헬라적 이원론이 기독교 신앙에 깊숙이 침투하여, 육체를 악으로 규정하고, 구원을 영적 지식을 통한 육체로부터의 해방으로 보는 영지주의의 극단적인 금욕주의가 출현되어, 비록 이단으로 정죄되었지만, 육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고방식은 사람들의 정신에 후대 교회에까지 크게 영향을 미쳤다.


2. 로마서 5장, 8장 -영과 육을 기준으로

바울은 히브리적 세계관 속에서 ‘육’( רָׂשָּב 바사르, basar)을 단순한 물질적 신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죄된 인간 본성 전체'로 이해했다.

따라서 그에게 구원은 영혼과 육체를 포함한 존재 전체가 성령의 인도 아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지향적 과정이었다. 하지만 헬라 세계에 복음을 전하면서, '육'을 의미하는 '사르크스'와 '영'을 의미하는 '프뉴마'라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해야만 했다. 헬라인들은 이 두 단어를 이원론적 세계관에 따라 '프뉴마'는 선하고 영원한 영혼, '사르크스'는 악하고 타락한 육체로 이해였다.

결국 이들에게 구원은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결과로 보았고, 이것이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크게 부딪히는 문제였다.

바울의 서신은 이 두 세계관의 충돌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는 로마서 8장과 갈라디아서 5장에서 "육체의 일"을 단순히 육체적 쾌락이 아닌 분쟁, 시기, 당파와 같은 관계적 죄악을 포함시키며 헬라적 오해를 바로잡으려 했다. 그럼에도 그의 메시지 속 히브리적 통전성은 헬라인들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않고, 바울의 의도로부터 크게 벗어나는 경향을 드러냈다.


(1) 헬라어: 영과 육의 이원론적 세계관

헬라 철학은 영(프뉴마, pneuma)과 육(사르크스, sarx)을 대립적이고 이질적인 실체로 간주한다. 이 관점에서 영은 불멸하고 완전한 존재의 근원이며, 육체는 타락하고 불완전한 물질적 존재로 여긴다.

• 영: 영혼은 육체에 갇힌 존재로, 이데아 세계의 진리를 추구.

• 육: 육체는 영혼의 성장을 방해하고 타락시키는 장애물.

이러한 결과적 세계관에서는 영이 육체를 초월하고 지배하여 완전한 상태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영혼의 구원은 육체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경향이 있다.


(2) 히브리어: 영과 육의 통합적 세계관

히브리어 세계관에서 ’영‘( חוּר 루아흐, ruach)과 ‘육’( ָׂ רשָבּ 바사르)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통합적으로 이해한다. '영'은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힘을 나타내며, '육'은 이 힘을 통해 창조된 연약한 인간 존재를 의미한다.

• 영: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넣는 창조적 '숨'이자 힘.

• 육: 하나님의 '루아흐' 없이는 연약하고 무가치한 '바사르'.

이러한 지향적 세계관에서는 인간의 죄가 단순히 육체의 문제가 아니라, 영과 육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벗어나 관계를 잃은 상태이다. 따라서 구원은 육체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영과 육이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3) 두 세계관에서 '영적'이라는 단어의 의미

바울 사도가 사용한 '영적'(pneuma-tikos)이라는 단어는 헬라적 세계관과 히브리적 세계관에서 전혀 다른 의미로 이해된다. 이 두 관점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바울 서신의 핵심 메시지를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헬라 철학에서 '영적'(pneumatikos)은 주로 육체와 대비되는 정신적이고 추상적인 영역을 의미했다. 이 세계관은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야만 순수성을 회복하고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영적'인 것은 곧 '정신적'이고 '비물질적'인 것을 뜻했다. 그래서 '영적'인 사람은 육체의 욕망을 억제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통해 영혼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여겨졌으며, 궁극적인 결과는 육체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이해했다.

히브리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루아흐'(성령)와 연결된다. '루아흐'는 창조의 숨결이자, 생명을 불어넣고 역사하는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힘을 의미한다. 따라서 바울에게 '영적'인 것은 단순히 육체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동적인 역사로 인해 변화된 존재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영적'인 사람은 단순히 금욕 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9절 이하에서 언급한 육체의 일(음행, 분쟁, 시기 등)과 5장 22절에서 성령의 열매(사랑, 희락, 화평 등)를 대조하여, 영혼과 육체를 포함한 존재 전체의 변화를 통해 나타나는 지향적 삶임을 강조했다.


이와 같이 바울 서신에서 '영(pneuma)'과 '육(sarx)'의 개념은 당시 헬라인들의 세계관과 히브리인의 세계관이 충돌하는 지점이었다. 바울은 헬라어로 글을 썼지만, 그가 말하는 '영과 육'은 히브리적인 '지향적 세계관'으로, 헬라인들이 흔히 이해하는 '결과적 세계관'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3. 바울서신에 드러나는 갈등 표출 부분

바울은 서신 곳곳에서 헬라인들이 오해할 수 있는 '영과 육'의 개념을 히브리적 관점으로 바로 잡으려 한 의도를 볼 수 있다.


(1) 로마서 8장 5-11절

이 구절은 바울의 의도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5절) : 헬라인들은 여기서 '육신의 일'을 성적인 방종이나 물리적인 쾌락으로, '영의 일'을 영적 활동으로 단순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6절): 바울은 여기서 '육신의 생각'을 단순히 육체적 행위가 아닌, 하나님을 거스르는 타락한 마음의 지향성으로 정의한다. 즉, 사망은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되는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지향성의 결과이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11절):

바울은 여기서 헬라 철학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만약 육체가 악하다면 영혼이 몸에서 벗어나 는 것이 구원일 텐데, 바울은 죽을 몸(육체)까지도 다시 살리신다고 선포한다. 이는 구원이 영혼의 해방이 아니라, 영과 육을 포함한 전인격의 온전한 회복임을 명확히 밝히는 지향적 메시지이다.


(2) 갈라디아서 5장 19-23절

헬라 세계관을 가진 청중들은 5장 19~21절과 22~23절을 구분하고, 전자는 육체를 후자는 영혼의 정신 및 신령한 영으로 별도로 구별하여 말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반면 당시 갈라디아 지역의 유대인들은 육과 영을 분리하지 않은 통전적 관점에 기초하기 때문에 본문을 구분하여 생각하지 않고 율법에 적용하여 율법적 행위의 부족함이 곧 육체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율법을 완벽히 지켜내는 삶의 결과를 ‘성령의 열매’라고 여겼을 수 있다.

바울은 이 메시지로 두 세계관이 충돌하여 각기 다른 청중들이 이해하는 오해를 바로잡으려 했을 것이다. 헬라인들에게는 구원이 단순히 육체를 억압하는 것이 아님을, 히브리인들에게는 구원이 율법적 행위의 완성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 목적임을 5장 16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는 말에 이끌린 문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명령과 이어지는 구체적인 예시는 헬라와 유대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언어로 복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매우 전략적인 설득 과정이었다.

헬라인들에게는 그들의 익숙한 이원론적 개념을 사용하여 접근했지만, 죄와 구원이 단순히 육체를 초월하는 문제가 아니라 전인격의 문제임을 암시하며 히브리적 통전성을 심어주었고,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적 행위의 한계를 지적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이 진정한 ‘의’를 낳는다는 새로운 관계적 지향성을 제시함으로써 복음의 길을 열었다.

결국 바울은 헬라와 유대 청중 모두에게 그들이 이미 가진 세계관의 한계를 깨닫게 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을 받을 때 영과 육이 온전히 회복되는 히브리적이고 통전적인 구원이 가능함을 설득하려 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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