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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안성삼 목사

2026년 7월 19일

“마지막 사명은 복음의 본질을 전하는 것입니다”
서유럽 선교 13년, 목회 20년, 그리고 다시 복음으로 돌아온 한 목회자의 후반전


한 사람의 목회 여정은 때로 한 권의 책보다 깊고, 한 편의 설교보다 생생하다. 계획한 길보다 인도하심의 길이 컸고, 붙잡은 사명보다 하나님께 붙들린 시간이 더 많았다. 서유럽 브뤼셀 선교 현장에서 13년, 한국교회 목회 현장에서 20년, 그리고 은퇴 이후 다시 ‘복음의 본질’을 붙들고 강단과 신학교, 수도원 사역을 이어가는 한 목회자의 고백은, 메아리가 되어 우리의 가슴에 전달된다. 

우리 교단에 귀한 어른, 스승으로 알려진 안성삼 목사(67)는 목회 은퇴를 했지만, 일주일의 절반은 서울에서, 절반은 전북 장수에서 생활하고 있다.

안 목사는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전남 광주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총신대, Northgate Bible College에서 공부했고, 개신대학원대학교, Continental Theological Seminary, 수도국제대학원대학교 등에서 신학 수업을 이어갔다. 1986년 예장 개혁 전남노회에서 목사로 임직한 뒤, 세계복음화선교회 한국지부 상임 간사, 세계교회성장연구원 수석연구원, 예장 개혁 총회 파송 유럽 선교사, 혜성교회 위임목사, 수도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와 총장 등 여러 사역의 현장을 지나왔다.

“돌아보면 제 계획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기도 제목도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것 같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그때그때 인도하셨습니다. 지금도 주어진 것만 감당하기에도 벅찹니다. 그러니 더 구할 것도, 기도제목도 없습니다.” 안 목사의 말이다.

 

공부의 길에서 선교의 길로

젊은 시절 안 목사는 학문의 길을 꿈꾸었다. 은사였던 총신대 은퇴 교수 서철원 박사가 그를 아끼며 유럽 유학을 권했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학문적 인맥을 통해 추천의 길도 열어주었다. 미국 유학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지 못한 방향에서 부르심이 찾아왔다. 신학생 시절 받은 장학금 가운데 리빙스턴 장학금이 있었다. 그 장학금은 선교사 후보생에게 주는 장학금이었다. 당시에는 “주면 받겠다”는 마음으로 받았지만, 훗날 그 일이 선교의 길과 연결될 줄은 몰랐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교단 선교부는 세계를 향한 선교 파송을 본격적으로 모색했다. 당시 개혁교단에는 선교사가 많지 않았다. 교단은 5대양 6대주로 선교사를 보내자는 비전을 품었고, 유럽의 중심지인 브뤼셀, 곧 당시 유럽공동체 본부가 있던 곳에 선교사를 보내기로 했다. 그때 지목된 사람이 바로 안 목사였던 것이다.

자신이 계획했던 삶의 방향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사코 거절했다. 안 목사는 6개월 동안 버텼다. 그러나 교단은 “왕복표라도 끊어 줄 테니 일단 한 번 다녀오라”고 했다. 그는 혼자 브뤼셀로 향했다. 그 시절에는 비행편도 지금처럼 편하지 않았다. 알래스카를 거쳐 24시간 가까이 걸려 도착한 낯선 땅이었다. 그런데 막상 브뤼셀에 도착하자, 그의 마음이 달라졌다.

“가서 보니 할 일이 보였습니다. 영혼들이 보였습니다. 왜 유럽에 선교사를 보내야 하는지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동남아나 아프리카라면 이해가 되었지만 유럽은 낯설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유럽에도 복음이 절실했습니다.”

당시 벨기에의 개신교 비율은 극히 낮았다. 가톨릭 문화가 깊게 자리한 사회 속에서 복음주의 교회의 존재감은 미약했다. 그는 그 현장을 보고 결심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세계교회성장연구원에 정식으로 사표를 내고, 가족과 함께 서유럽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1989년의 일이었다.

 

브뤼셀 선교, “가보니 영혼들이 보였습니다”

브뤼셀 사역은 처음부터 만만치 않았다. 유학생 사역만을 생각했지만, 실제 현장은 훨씬 다양했다. “처음부터 선교 열정이 대단해서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제 계획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길을 여셨고, 막상 가보니 영혼들이 보였습니다.”

브뤼셀 사역은 한 도시의 한인교회 사역에 머물지 않았다. 벨기에, 독일,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등 유럽 중심부를 연결하는 허브 사역으로 확장되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홀로 감당하던 사역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여러 교회와 사역이 세워졌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시고, 사역을 세우시고, 필요한 때마다 길을 여셨다.

그의 브뤼셀 사역은 햇수로 13년, 두 텀에 걸쳐 이어졌다. 그러나 일반적인 선교사처럼 안식년을 충분히 갖기 어려웠다. 선교 현장이 아직 약했고, 사역자가 자리를 비우면 공백이 너무 컸다. 선교대회 때 잠시 한국에 들어오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는 그 시간을 “하나님이 하신 일이 어마어마했다”고 회고한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예배 공동체를 세우게 하시고, 필요한 자료와 동역자를 붙여주셨다. 현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외교관과 유학생들이 말씀을 배우고, 미군과 국제기구 관계자들이 신앙의 길로 들어서는 일들이 일어났다. 브뤼셀을 비롯해 6군데 지역에서 지교회가 세워져, 안 목사는 순회사역을 했는데, 브뤼셀에 선교센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기도를 하게 되었다.

브뤼셀 사역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는 센터 건물 구입이었다. 현지에는 사역을 위한 안정적인 공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상황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부도가 난 건물 주인의 사정과 맞물려, 예상보다 낮은 가격에 건물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IMF 외환위기를 맞았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은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한국의 경제 위기로 선교비 송금이 어려워지고, 유럽 사역도 큰 위기를 맞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은 뜻밖의 길을 여셨다.

결국 센터 건물주의 적극적인 협조 속에서, 건물을 구입할 수 있었는데, 계약 과정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했다. 당시 브뤼셀의 은행에서는 국가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인 선교사한테 단 1프랑도 빌려줄 곳이 없었다. 하지만 건물 주인은 안 목사를 신뢰했고, 이자 없이 3개월, 6개월 단위로 갚아나가는 조건을 허락했다. 일을 봐주던 변호사도 “25년 동안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 후부터 기적 같은 일이 이어졌다. 이자와 원금을 갚아나가는 마감 기한이 다가올 때마다 필요한 돈이 들어왔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3개월, 6개월 단위로 갚아야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채우셨다. 하나님의 그 섭리가 “너무 재미있었다”고 여겨질 만큼 놀라웠다. 불가능해 보이던 일이 하나님의 속도 안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마지막 순간이었다. 마감 일주일을 남기고 모든 빚을 갚았다. 그리고 모든 돈을 완제한 이후, 그 통장에는 더 이상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그 일을 통해 분명히 깨달았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적도 있지만, 끝나면 멈추시는 은혜도 있습니다. 빚이 남아 있었다면 저는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기 위해 먼저 정리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그 자리에 오래 머물도록만 하지 않으셨다. 어느 날부터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부르심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국 혜성교회로…20년 목회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요청 앞에서 안 목사는 고민했다. 브뤼셀에는 이미 사역의 기반이 세워졌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현장이 있었다. “혹시 잘못 듣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14년 동안 브뤼셀 선교센터와 6개 지역에 교회를 세우는 등, 선교사로서 사역이 펼쳐지고 있었던 터라, 안 목사의 인간적인 마음은 한국으로 나온다는 결정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 가지 사인을 주셨고, 결국 한국의 목회 현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무 조건 없이 선교 현장을 잘 이끌어갈 후임 선교사에게 물려주었다. 안 목사의 또 다른 목회의 여정이 펼쳐진 셈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광주 혜성교회에서 20년간 목회했다. 광주 혜성교회로 돌아오게 된 배경에는 단순한 청빙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광주는 그에게 낯선 도시가 아니었다.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지만, 외가와 처가가 모두 광주와 연결되어 있었고, 부교역자 시절 광주 혜성교회를 기도하며 지켰던 시간이 있었다. 1980년 5월, 광주가 고통과 피의 시간을 지나고 있을 때, 그가 기도하며 지켰던 교회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유럽 선교 현장과는 전혀 다른 한국교회의 현실 앞에서 충격도 있었다. 노회와 교회, 목회 현장의 여러 갈등과 부딪힘도 겪었다. 건강도 좋지 않았다. 심장 수술을 받으며 생사의 갈림길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시간도 사명의 전환점이 되었다. 병상에서 그는 다시 부르심을 들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영적 사관학교’의 비전이 다시 살아났다. 순종하면 일어나고, 순종하지 않으면 여기서 끝날 것 같다는 절박함 속에서 그는 다시 회복되었다.

 

 수도원, 그리고 영적 사관학교의 꿈

안 목사는 혜성교회에서 65세에 조기 은퇴를 선언하고, 원로목사라는 자리에 머물기보다, 은퇴목사로 물러나 후임자의 길을 열어주었다. 지금은 수도국제대학원대학교에서 선교신학을 가르치고, 채플과 강의를 통해 신학생들을 세우며, 수도원에서 목회자와 평신도들에게 복음의 본질을 나누고 있다.

그는 스스로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건강만 허락된다면, 남은 시간 동안 복음을 전할 제자들을 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그가 꿈꾸는 것은 단지 자신의 설교를 듣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다. 복음의 핵심을 붙든 목회자와 신학생, 평신도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라고 했는데, 아직도 축복 설교에 머물 때가 많습니다. 바른 말을 하더라도 사람을 죽이는 방식이 아니라, 양을 살찌게 하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복음은 사람을 살립니다.”

또한 안 목사는 기도했던 대로, 전북 장수에 수도원 공간을 마련했다. 처음부터 거창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교였던 낡은 공간, 요양원으로 쓰였던 건물, 부도와 방치의 흔적이 남은 자리를 보며 “수리하면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돈은 없었다. 그러나 브뤼셀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은 사람을 붙이셨다. 토목공사를 맡은 장로, 창호 공사를 헌신한 집사, 수리와 리모델링을 감당한 이들이 하나둘 연결되었다. 어떤 이는 목사님을 만나고 경제적 응답을 받았다며 감사함으로 헌신했고, 어떤 이는 자신의 기술과 장비를 가지고 와서 무너진 공간을 다시 세웠다.   

그렇게 세워진 수도원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쉼과 기도, 대화와 말씀을 나누는 공간이 되었다. 그는 이곳을 단지 조용히 머무는 장소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는 훈련의 자리, 목회자들이 다시 강단의 중심을 붙드는 자리, 신학생들이 복음의 핵심을 배우는 자리로 삼고자 했다.

 

“한국교회 강단이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최근 안 목사가 가장 깊이 고민하게 된 것은 한국교회 강단이었다.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나려면 강단이 바뀌어야 한다는 확신이 생겼다. “제가 마지막에 할 수 있는 일은 복음입니다.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가르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는 주일 채플을 시작했고, 신학생과 목회자, 교수와 평신도들에게 복음의 핵심을 전하기 시작했다.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지막까지 제가 해야 할 일은 복음의 핵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안 목사의 후반전 사역은 오직 ‘복음’의 길이다. 그 복음의 길을 가는데, 무엇보다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이 있다.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은 자리도, 직함도, 건물도 아닌, 오직 ‘복음’이라는 사실이다.

 

안성삼 목사가 전북 장수에 마련한 국제수도원의 조감도
안성삼 목사가 전북 장수에 마련한 국제수도원의 조감도

/오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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