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8일
하나님의 능력과 복음의 깊이로 채워가는 교회
“복음으로 살아나는 교회, 성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서울 동북부 끝자락, 지하철 신내역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띄는 교회가 있다. 1층에는 아담하고 맛있는 커피로 입소
문난 커피숍이 자리하고, 커피숍 한 켠은 식당 및 문화센터, 2층에는 예쁘고 소박한 교회가 자리한다. 교회가 자리한 동네를 지나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초입에 위치, 주변에 한국의 내로라 하는 대형교회가 많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바로 고천일 목사(74)가 시무하는 ‘새길교회’의 첫 인상이다.
장로로 교회를 섬기다가 47살에 늦깍이 신학생으로, 싱가포르 선교사로, 다시 한국에 들어와 개척교회 목회자로 섬기다가 현재 새길교회로 인도받기까지,고 목사의 목회 여정은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비 고비마다 하나님의 능력과 복음의 깊이를 체험할 수 있도록, 은혜가 함께 하는 목회의 길을 걷게 하셨다.
늦게 부르신 길, ‘소명’의 시간으로…
고 목사의 목회 여정은 화려한 신학교 코스나 일찍 세워진 소명 이야기로 시작되지 않았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곳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하지만 직장생활 이후 사업 실패, 그리고 뒤늦은 신학 공부라는 우회로를 거쳐 이르렀다.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모태신앙으로 자랐다. 휴전 직후 태어난 세대였다. 유년 시절을 부산에서 보내다 일곱 살 무렵 강원도 춘천으로 이주했고, 이후 그곳에서 성장했다. 감리교 천막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청소년 시절에는 성결교회를 거쳤으며, 성인이 된 뒤에는 합동측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그의 신앙 여정은 처음부터 한 교단 안에 머무르지 않았다.
청년 시절 그는 교회보다 직장에 더 깊이 발을 들였다. 서른두 살에 특채로 KT에 입사해 전력 담당으로 15년을 근무했다. 교회에서는 평신도 집사로 섬겼고, 1996년에는 장로 안수를 받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안정적인 신앙인이자 직장인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갈증이 남아 있었다. 그 갈증은 뜻밖의 방향으로 그를 이끌었다. 직장 이동 문제를 두고 고민하던 중, 그는 사표를 냈다. 신앙을 지키기 어렵겠다는 두려움이 컸다. 이후 아무 경험도 없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인켈 대리점을 시작했고, 패기 하나로 버텼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월말마다 어음을 막기 위해 뛰어다녀야 했고, 결국 5년 만에 부도를 맞았다.
사업 실패는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교회 건축 재정을 맡았던 그는 이중의 부담을 떠안았고, 삶은 급격히 무너졌다. 아이들이 교육 비용이 들어가던 시기였고, 가정의 무게는 더욱 컸다. 그는 이 시기를 “인생이 뒤로 밀려난 시간”이라고 표현한다.
결국 고 목사는 마흔일곱 살이 되던 해, 늦은 나이에 신학의 길로 들어섰다. 한국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처럼, 그의 사역 역시 ‘열심’으로 시작됐다.
2002년, 신대원 1학기를 마친 뒤 그는 다시 한 번 예상치 못한 부르심을 받았다. 싱가포르 선교사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언어도 문화도 낯선 땅이었다. 처음에는 교민 사업가가 운영하던 식당과 연결되었고, 이후 현지 한인교회와 싱가포르 로컬 교회를 오가며 사역을 경험했다. 싱가포르는 영국 식민지의 영향으로 감리교 전통이 강했고, 웨슬리 교회는 15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공동체였다. 성도만 6천 명에 달했고, 오후 2시에는 한국어 예배 공간을 열어주었다. 그곳에서 그는 모 한인교회 부교역자로 섬길 기회가 생겼다. 물론 우여곡절이 많은 싱가포르 사역이었지만, 하나님은 그의 싱가포르 현지 사역을 통해, 많은 눈을 열어 주셨다. “한국 교회가 쉽게 놓치고 있는 것들을 보았습니다. 질서, 절제, 그리고 예배에 대한 경외감이었습니다.”
그 경험은 이후 그의 목회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많이 아는 것’이나 ‘뜨거운 열정’이 아니라, 신앙의 기초와 예배의 본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처음으로 체감한 시간이었다.
다시 교회를 개척하고, ‘말씀’ 속에서 목회의 본질 찾아
귀국 이후 고 목사의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강원도 원주에서 개척을 했지만, 재정적 부담과 자녀들의 학업 문제로 지속하기가 어려웠다. 설상가상 건강 문제에도 어려움이 와서 잠시 목회를 쉴 수밖에 없는 시간도 있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고 목사의 전환점은 서울 청량리에 자리한 교회에서의 목회였다. 2008년 형식상 청빙이었지만, 실상은 개척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치유 사역으로 유명했던 교회였는데, 예배는 무너져 있었고, 교회는 방향을 잃고 있었다.
“무엇보다 성도들이 예배가 회복되고,복음이 제대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방향을 세웠어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성령에 대해 말씀 중심으로 세워질 수 있도록 강단의 방향을 맞춘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치유와 은사 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오다보니, 여러 차례 영적으로 긴장을 해야 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고 목사 의 고백이다.
결정적인 계기도 있었다. 한 성도가 생사의 갈림길을 걸었던 순간, 고 목사는 성도들의 모든 형편과 삶의 기준이, 말씀과 기도에 전무할 수 있도록 안내한 것이다. 이 결정적인 시간표를 겪고, 고 목사는 “교회가 말씀으로 다시 돌아온 결정적인 순간”이었다고 고백했다. 성도들이 한 명씩 변화되어 가면서, 조금씩 전도도 되어졌다.
고 목사는, 목회의 방향에 분명한 결단을 내렸다. 더이상 분위기와 프로그램으 로 교회를 세우지 않겠다는 결단이었다. 처음으로 돌아갔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성령이 어떤 분이신지를 차근차근 가르치기 시작했다. 헌금이나 숫자, 외형적 성과보다 말씀의 기초를 세우는 데 집중했다. 예배의 본질이 회복되지 않으면, 어떤 열심도 오래가지 못한다는 확신에서였다.
수차례의 이동과 실패,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과정을 거치며 고 목사는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고 목사가 꿈꾸는 교회의 모습은 분명하다. 탁월함보다 정직함, 능력보다 복음, 화려함보다 진리를 우선하는 공동체다. 성품과 인격 위에 믿음이 세워지지 않으면, 교회는 결국 무너진다는 확신 때문이다.
사모와 자녀, ‘동역의 현장’으로 세워진 목회
목회의 방향이 바뀌면,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곳은 가정이다. 예배의 본질을 붙들겠다는 결단은 강단에서만 증명되지 않는다. 목회자의 여정에서 사모(이근양 사모)와 자녀들은 언제나 ‘곁에 있는 배경’이 아니라, 목회의 방향을 함께 감당해 온 또 하나의 현장이었다. 잘 나가던 KT에서 근무했던 이 사모는, 고 목사의 목회 여정에 온전히 함께 하는 동역자였다.
특히 반복되는 개척과 이동의 시간은 가정에 큰 부담이었다. 원주에서 춘천으로, 다시 수도권으로 옮겨 다니는 동안, 안정적인 삶의 기반은 늘 뒤로 밀렸다. 교회가 채워질 즈음이면 다시 정리해야 했고, 자녀들의 진학 문제와 경제적 압박은 늘 현실적인 고민이었다. 그럼에도 사모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을 따라가는 길”이라는 기준을 놓지 않았다.
외형적인 도움 없이도, 고 목사의 자녀들은 너무나 훌륭하게 성장했다. 피아노 학원 한 번 보내지 못한 시간도 있었다. 대신 예배와 찬양, 말씀의 자리를 일상속에 두었다. 경배와 찬양 반주 훈련, 가정 예배, 교회 예배 준비는 자연스럽게 가족의 삶이 되었다.
그 결과는 ‘계획하지 않은 방향’에서 나타났다. 자녀들은 각자의 길을 걸었다. 음악을 전공한 딸들은 작곡과 연주, 학문과 예술을 넘나들며 자신의 영역을 세워갔고, 막내는 해외에서 학문의 길을 이어가고 있다. 아들은 사업의 현장에서 자리를 잡았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 길이 ‘부모의 욕심’이 아니라 ‘자기 소명’이라는 점이다. 고 목사는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도록 내버려 두는 기도”를 했다
고 한다. 고 목사 자신도, 성도들도, 자녀들도, ‘복음의 진리 안에서 같이 서가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라고 말한다.

/오윤정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