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서울 예원교회)
2025년 6월 16일
죽은 믿음과 살아있는 믿음 (야고보서 2:14-26)
서론
신약성경의 모든 서신서들은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서신이 누구에 의해, 어떤 수신자에게,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주어졌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그 서신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 작업입니다. 야고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지 불과 20년이 채 되지 않은 때에 당시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지도자 중의 하나였던 야고보가 로마 제국 내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서신서입니다.
야고보서가 쓰여진 배경은 A.D.30년경 후반경 스데반의 순교 이후로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그리스도에 대한 유대교의 대대적인 박해를 피하여 로마제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공동체 곧 디아스포라에 정착하였거나 아니면 이미 오래 전부터 디아스포라를 형성하고 있었던 유대인들 가운데 복음이 전파됨으로 인해 개종하게 된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흩어진 성도들의 삶은 한 마디로 ‘시련’ 그 자체였으나 초기의 그들의 삶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고귀한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흩어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외적으로는 유대교를 신봉하는 동족들의 핍박으로 인하여 큰 시련을 겪고 있었고, 내적으로는 서로 사랑하며 유무 상통하던 예루살렘 초대교회 공동체와 달리, 서로에게 비방과 판단을 일삼으며 가난한 자를 무시하고 차별하였습니다. 또한 계속되는 시련에 지쳐서인지, 세상과 타협하여 급속히 세속화되어 가는 조짐들이 나타났습니다. 즉 성도들은 다툼과 분쟁을 일삼고, 세상의 악한 지혜를 따라 살며, 자기 뜻과 계획대로 세속의 부를 축적하는 데에 관심을 집중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이신득의 교리를 강조한 바울의 가르침이 퍼질 즈음인데 흩어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하거나 믿음에 합당한 실천없이 세속화 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러한 상황속에 당시 수신자들에게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기는 하였으나 그에 합당한 신앙의 열매들을 전혀 맺지 못하고, 행위가 결여된 그들의 믿음을 지적하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2:17, 26)이며, 더 나아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2:24)고 강조하였습니다. 이 부분이 바울의 이신득의 교리와 상충되는 듯 하지만, 오히려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천이 따르지 않는 기만적인 믿음을 공격한 것입니다. 말로만 외치는 죽은 믿음이 아닌 살아있는 말씀이 믿음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1. 죽은 믿음
1) 행함이 없는 믿음(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야고보서 2장 1절~13절은 참 믿음은 지식과 행동이 일치된 것이라는 원칙론적 진술과 그러면 그 원칙을 생활의 구체적 측면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설명을 번갈아 진술하는 방법으로 편지를 썼는데, 그 첫번째로 세상적 기준에서 인간을 차별 대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차별을 금지해야 할 이유는 주님이 차별하시지 않았기 때문이고, 가난한 자에게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고, 차별은 이웃 사랑의 계명에 어긋나고, 심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임을 명시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이웃을 대하는 우리의 행동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고 그것은 완전히 일치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사람을 외모로 취하여 가난한 자들을 차별하는 것은 사실 믿음이 없다는 증거이거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야고보는 본장 1-13절 단락에 이어지는 14-26절 단락에서 믿음은 반드시 행함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라는 사실과 행함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행함’에 해당하는 단어 ‘에르가’는 ‘에르곤’의 복수입니다. 사도 바울은 살전 1:3 ‘믿음의 역사’, 즉 ‘투 에르구 테스 피스테오스’라는 표현을 썼는데, 여기에서 ‘역사’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본문에서 ‘행함’으로 번역된 단어 ‘에르곤’입니다.
이는 행함이라는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살아 움직이는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냈습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구원은 율법적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중생한 자가 그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믿음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열리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 믿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성령의 합당한 열매가 나올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2) 말만 앞서는 믿음(2:15-17)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이것은 당시 초대교회 내의 실제적인 상황을 묘사한 것입니다. 여기 ‘형제나 자매’라는 것은 매우 궁핍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다름 아닌 같은 성도임을 보여줍니다. ‘헐벗고’의 헬라어 ‘귐노이’는 실제로 벌거벗은 것을 의미하는 과장된 표현으로, 지금 성도가 절망적 상태에 처해 있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안에 있는 성도들의 아픔의 이야기를 듣고 말로만 평안하라고, 따듯하게 하라는 것, 배부르게 하라고 하는 것은 충분히 나누어 줄 수 있음에도 가난하고 궁핍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무시하는 것이며, 말로만 떠들어대는 위선과도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성도는 그의 지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지체가 아프고 힘들다고 고통스러워 하는데 나는 괜찮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한 지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말로써 행위를 대신하는 거짓 믿음입니다. ‘죽은’으로 번역된 ‘네크라’는 무익할 뿐 아니라 해롭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즉 실제적인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 믿음은 본인과 이웃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실족시킨다는 측면에서 해롭기까지 한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건강하라고 말은 하지만 그 필요에 대해 모르는체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가 자녀를 낳으면 너무 예뻐서 주고 또 주고 싶고, 주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생명적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받았음에도 형식적인 믿음만 강조하는 것은 그 십자가 사랑을 모르거나, 체험하지 못한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3) 귀신도 아는 믿음(2:18-19)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본절에서 ‘나’라는 존재는 행함이 있는 존재임이 명확하게 나타나고, ‘너’라는 존재는 믿음이 있는 존재로 부각됩니다. ‘나’는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는 자’이고, ‘너’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진 자’인데,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계신 것은 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귀신들이 하나님을 알고 인정한다고해도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많이 알아도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말은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행동하기 이전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속에 담겨진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대속과 부활의 생명은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고, 성자 예수님이 구원을 이루셨으며, 성령 하나님이 보증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고백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인생의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2. 살아있는 믿음
1) 행함이 따르는 믿음(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이해하지 못하는 영적 결핍 상태를 말합니다. 열매 없는 자기의 믿음을 뛰어난 것으로 자랑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결국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자로써, 야고보는 그들로 하여금 행함 없는 믿음이 무익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만 앞세우고 행하지 않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마 23:3,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말씀하셨고, 이들을 향해 마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행함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2) 의로운 아브라함의 믿음(2:21-24)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이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이야기는 불신자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아들을 죽여 번제로 드리려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행함이 수반된 믿음입니다. 이렇게 행함이 수반된 믿음은 사도행전에도 나옵니다. 바나바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궁핍함을 보고 자신의 재산을 팔아 나누어주었습니다. 이에 반해 아나니아 삽비라는 바나바와 같이 밭은 팔았지만,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으로 절반을 감추다가 성령을 모독한 죄로 쌍묘의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행위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행함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이며 짝을 이 루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함께 일하고'라는 것은 '그런 상태가 과거에 지속적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 당시 그의 믿음이 행함으로 드러난 사건은 아들 이삭을 바친 사건입니다. 참된 믿음은 행동으로 드러났을 때 비로소 그 진정성이 입증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행위는 반드시 참된 믿음에 의해서만 만들어집니다. 믿음과 행함이 결합되어 있는 아브라함에게서 우리는 단순한 신앙고백의 차원을 넘어 행함의 근본원리로서 활동하는 믿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오랫동안 후사가 없었음에도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행동하는 믿음과 순종의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함을 받았는데 ‘사랑받는 친구’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믿음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사랑받는 친구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 15: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는 친한사이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을 알고 친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을 지키고 믿음의 삶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칫 이 말은 바울이 말한 이신득의와 상충되는 말인 것 같지만 실상 행위는 살아있는 믿음의 필연적 산물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행함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 헛된 믿음이며 죽은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속에서 믿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즉 행동으로 증명되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유유상종' 혹은 '가재는 게편'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비슷한 부류끼리 어울리고 친해진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고 소유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처음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나올때는 하나님에 대해, 말씀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믿음이 연약합니다. 하지만 말씀을 들을수록 믿음이 자라가서 에스겔서 말씀처럼 발목신앙에서 가슴신앙으로 자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그 말씀의 은혜를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갈대아 우르를 믿음으로 떠났지만 처음에는 연약한 믿음으로 인해 기근이 오니까 애굽으로 내려가는 불신앙을 하였습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팔며 자신 목숨을 구걸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자라갈수록 환경과 세상 기준의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선택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3) 기생 라합의 믿음(2:25-26)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기생 라합은 여리고에 사는 기생이었는데 라합은 여호수아 2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애굽에서 나왔으며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듣고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수 2: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고백하였습니다. 자신의 나라에 숨어 들어온 정탐꾼을 숨겨주는 것은 목숨을 담보한 것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진 라합은 비천한 직업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여걸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라합의 믿음의 순종은 단순한 감상이 아닌 생사를 건 결단이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믿는 우리에게도 끊임없이 미혹과 유혹이 찾아오고, 불신앙할 만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오지만, 아브라함과 라합과 같이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모든 선택에 있어 주저함없이 믿음의 행함이 되어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의 요약은 간단명료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시체, 즉 영이나 호흡이 없는 시신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은 것이며, 쓸모가 없으며, 매장되기에만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구원하는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수고 혹은 행위들로 드러나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라합의 두 가지 예는 전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신앙과 행위가 상반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실상 이 둘은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없이 행동에 옮긴 사람은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사람의 신앙이 그 사람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과 행위는 인간이 하나님을 체험하는 양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옵니다. 내 마음과 생각속에 담겨진 것이 말로 혹은 행동으로 열매를 내는 것입니다. 참기름을 만지면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나는 것처럼, 믿는 자의 심령속에 담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반드시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을 구원하여 원래 형상으로 회복시키신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능력을 갖고 누리는 만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삶이 살아지는 것입니다. 억지가 아닌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누리면 가장 가까운 이웃인 남편, 아내 그리고 만남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무엇보다 생명이 없는 사람에게 예수 생명을 전하는 사랑을 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서로 사랑해야 할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며 살아갈까요? 그것은 그 사람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담겨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죽기까지 희생하신 그 십자가 사랑을 체험하는 살아있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믿음으로 순종할 때만 믿음이 역사하여 말씀이 이끄는 삶을 살게 됩니다.
초대교회 이후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변질되었습니다. 바울이 말한 ‘이신득의’ 사상을 악용하여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말로는 ‘믿음’을 외치지만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외식과 방종으로 타락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마음과 심령을 감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말씀이 아닌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죽은 믿음이 아닌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삶으로 나타나 생명 살리는 복음 증인으로 서길 바랍니다. 아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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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수, 창립100주년기념 성서주석. 대한기독교서회, 2008.
· 랄프 P.마틴, WBC 성경주석. 도서출판 솔로몬, 2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