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야(광주 예일교회)
2025년 6월 16일
그리스도가 성취한 구원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이중적 유익에 대하여 논하라
서론
1. 연구의 배경과 문제 제기
기독교 신학에서 구원의 주제는 언제나 중심적 논의였다. 특별히 개혁주의 신학 전통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과 신자와의 연합(unio cum Christo)이 강조되며, 칭의와 성화라는 이중적 유익이 신앙의 핵심 요소로 다루어진다. 그러나 현대 교회에서는 칭의와 성화의 균형이 무너지는 현상이 자주 발견된다. 일부 교회는 칭의의 법적 선언만을 강조하여 실제적이고 지속적인 성화의 중요성을 간과하거나, 반대로 성화를 율법적 행위로 오해하여 복음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율법주의적 신앙에 빠지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개혁주의가 본래 지향했던 칭의와 성화의 통합적이고 균형적인 신앙 생활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본 연구는 그리스도가 성취한 구원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얻게 되는 칭의와 성화의 이중적 유익을 다시 명확히 하여,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에게 실천적 신앙의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2. 연구 목적과 필요성
본 연구의 목적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지닌 신학적 본질과 의미를 성경적, 신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을 중심으로 칭의와 성화가 어떻게 상호 연관되어 있는지를 밝히고, 이를 통해 현대 교회의 신앙적 혼란을 극복할 신학적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다. 셋째, 칭의와 성화가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으로서 교회 공동체의 신앙 생활에 실질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며, 성례(세례와 성찬)를 통해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탐구하여 교회가 균형 잡힌 신앙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 현대 교회가 직면한 신학적, 실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 연구의 필요성이 절실하며, 이를 통해 신앙의 본질적 균형을 회복하고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구축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3. 선행연구 검토 및 차별성
지금까지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다수의 신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존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모든 구원적 은혜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으며, 칭의와 성화의 불가분성을 강조하였다. 루이스 벌코프와 헤르만 바빙크는 조직신학적 접근을 통해 이 두 유익이 연합의 구조 속에서 어떻게 상호 보완적인지를 깊이 있게 분석하였다. 최근 나용화 박사는 ‘성경적 조직신학’에서 언약적이고 존재론적 차원에서 연합을 다루며, 이 연합이 성도의 실제적 삶과 공동체의 신앙적 실천에 필수적인 개념임을 설명하였다. 본 연구는 기존 연구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진 현대 교회의 실천적 문제, 특히 반율법주의와 율법주의 사이의 극단적 경향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삼위일체적 구속사 구조와 성례론과의 긴밀한 연관성 속에서 균형 잡힌 신앙생활의 실천적 방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기존 연구와 차별성을 지닌다.
4. 연구 방법 및 구조
본 논문은 성경신학적, 조직신학적, 실천신학적 접근을 통합적으로 활용하여 연구를 수행할 것이다. 성경 본문 연구를 통해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과 연합 개념의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주요 개혁주의 신학자들(칼빈, 벌코프, 바빙크, 나용화, 유해무 등)의 저술을 조직신학적으로 분석하여 이중적 유익의 신학적 토대를 마련할 것이다. 또한 성례론 을 중심으로 한 실천신학적 접근을 통해 현대 교회가 실제로 이 신학적 개념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탐구할 것이다.
논문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장에서는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구원의 본질을 언약적 틀에서 분석하며, 2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통한 구속 사역을 다룬다. 3장에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신학적 의의와 성령의 사역을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4장에서는 연합에서 얻게 되는 이중적 유익(칭의와 성화)을 다루고, 마지막으로 5장에서는 성례가 이 연합과 이중적 유익을 교회와 성도들의 삶에 실제로 적용하는 방안을 제시할 것이다. 결론에서는 전체 연구를 요약하고 현대 교회를 위한 신학적, 실천적 제언을 제시한다.
Ⅰ.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의 본질
1. 창조와 인간의 원래 상태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Imago Dei)대로 창조하시고(창 1:27), 그들에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사명을 맡기셨음을 밝힌다( 창 1:28). 이는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존재하며, 그분의 뜻을 이루는 것이 창조 목적임을 나타낸다. 바빙크는 이에 대해 “하나님의 형상이란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도덕적 책임을 지는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1)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으며(사 43:7), 하나님과의 연합 속에서 참된 기쁨과 만족을 누리도록 계획되었다. 존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창조의 질서를 따를 때 가장 복된 상태에 이를 수 있도록 하셨다”고 강조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거룩하고 의롭게 창조하셨으나, 인간이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타락하였다”고 진술하며(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6장 1항), 인간의 원래 상태가 타락으로 인해 철저히 변질되었음을 강조한다.
2. 타락과 인간의 죄
그러나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을 요구받았다. 창세기 2장 16-17절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 것을 명령하셨 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죄를 범하게 되었고, 이는 단순한 실수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를 거부한 반역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창 3:6-7),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완전한 관계가 단절되었으며, 죽음이 인류에게 들어오게 되었다. 로마서 5장 12절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나용화 박사는 이에 대해 “타락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할 수 없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의로움을 회복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타락한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하였으며, 하나님께로 향하는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상실하였다”고 선언하며(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6장 2항), 인간이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강조한다.
3. 인간의 전적 부패와 구원의 필요성
이 타락 사건은 단순한 도덕적 실수나 개 별적인 범죄 행위가 아니라, 인류 전체를 죄 아래 놓이게 한 근본적인 상태 변화였다.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전적인 부패(total depravity)에 빠졌으며,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능력이 없는 절망적인 상태가 되었다. 이사야 64장 6절은 인간의 의를 ‘더러운 옷’에 비유하며, 인간의 어떠한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또한 로마서 3장 10-12절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다음과 같이 명확히 선언한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인간이 “영적으로 죽었으며, 모든 부분에서 부패하였으며,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어떤 선도 행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9장 3항).
4. 하나님의 구속 계획(언약의 틀에서)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부터 이미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으며, 창세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예정하셨다. 에베소서 1장 4-5절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선포한다. 바빙크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은 우연적이거나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창세 전부터 정해진 언약적 약속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설명한다.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자들을 예정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방편을 제공하셨다”고 선언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장 5항).
결국,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로운 개입이 필수적이 되었으며, 이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대속 사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는 구원의 유일한 길이 인간의 행위나 도덕적 노력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제공된 그리스도의 희생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음을 명확히 한다(행 4:12).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며, 인간이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이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엡 2:8-9).
Ⅱ.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통한 구속의 성취
구약에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은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 각각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 직분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성취되었다. 이는 구약의 예표적 구조가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성취됨을 의미한다. 헤르만 바빙크는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열쇠”라고 지적하며, 삼중직이 인간의 모든 구속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구조적 틀임을 강조한다.4)
또한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인간 사회에서 구원자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삼중직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회복하시고 그의 통치를 실현하신다”고 강조한다.5) 카이퍼의 이러한 관점은 그리스도의 삼중직이 단순히 개인적 구원 차원을 넘어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차원까지 확장됨을 시사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단순한 구원의 체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온 세계에 미치는 방식을 이해하는 틀로써 작용한다.
나용화 박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선지자, 제사장, 왕직)은 구속사 전체를 통합적으로 이끄는 중심 구조로서, 인간의 죄와 타락을 온전히 회복하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핵심이다. 선지자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과 구원의 비밀을 계시하시고,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몸을 단번에 속죄 제물로 드리며 백성을 중보하셨고, 왕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시고 보호하시며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꺾으셨다. 이 삼직은 분리된 직무가 아니라, 하나의 통합된 구속 사역이며, 예수님의 공생애와 십자가, 부활, 승천, 현재의 중보 사역 속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난다.6) 즉, 선지자직은 죄로 인해 왜곡된 진리를 회복하며, 제사장직은 죄의 형벌을 해결하고, 왕직은 죄의 지배를 무너뜨린다. 이를 통해 구원은 인간의 전인격적 변화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우주적 차원에서의 회복을 포함한다.
유해무 박사는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개혁신학적 신앙고백에 있어서도 중심적이며, 특히 개혁주의 교회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7) 이는 개혁신학이 삼중직을 단순한 개인적 경건의 차원에서만 다루지 않고, 교회의 사명과도 밀접하게 연결시키는 점을 보여준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의 선지자적 사역을 계승하여 진리를 선포하고, 제사장적 사역을 계승하여 중보하며, 왕적 사역을 계승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해야 한다.
존 파이퍼는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단순한 직무 수행이 아니라, 그분의 영광과 기쁨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하며, 삼중직을 기독교의 궁극적 기쁨과 연결한다.8) 즉, 예수님께서는 선지자로서 참된 진리를 계시하시고, 제사장으로서 자기 백성을 위한 완전한 희생을 이루시며, 왕으로서 그의 백성을 다스리고 보호하신다. 이를 통해 그분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완성하고 확장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 개념은 개혁주의 신학에서뿐만 아니라 초기 교회 신학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이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단순한 도덕적 본보기가 아닌 구속적 사역임을 강조하는 데 기여한다”9)고 지적한다.
웨인 그루뎀은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신자의 신앙과 신학적 이해를 구조화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개념으로, 이는 예수님의 사역이 전체적인 구원론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한다”10)고 설명한다.
예수님은 단순히 이 세 직분을 개별적으로 수행한 것이 아니라, 한 분 안에서 이들을 온전히 통합하고 완성하셨다. 따라서 삼중직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신학적 개념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문답 26에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며, 만왕의 왕으로서 그의 백성을 다스리고 보호하시며, 그의 원수들을 정복하신다”고 설명하며, 삼중직이 단순한 신학적 구조가 아니라 신자들의 신앙과 교회의 실제적 삶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구약의 예표적 직분을 완성하는 동시에, 개인적 구원과 공동체적, 우주적 차원의 회복을 포함하는 종말론적 사역을 의미한다. 이는 신자들에게 단순한 교리적 이해를 넘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과 사역을 따르도록 요청하는 신학적 기초가 된다.
1. 선지자적 직분: 하나님의 온전한 계시
예수 그리스도는 선지자로서의 직무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고, 인간의 무지와 영적 어두움을 밝히는 사역을 감당하셨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백성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 백성에게 전하였으며, 이로써 하나님의 뜻과 계획, 경고와 위로를 선포하였다(렘 1:5; 사 6:8-9). 그러나 그들의 계시는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것이었다(히 1:1). 신약은 이러한 구약 선지자들의 역할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성취되었음 을 증언한다.
신명기 18장 15절에서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고 예언하였으며, 사도행전 3장 22-23절에서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 인용된다. 예수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계시 그 자체였다(요 1:1, 14). 그는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아시며(마 11:27), 이를 온전히 계시하신 분이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43문은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에 대해 “그리스도는 교회의 건덕과 구원에 관한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모든 세대에 성령과 말씀을 통해서 여러 가지의 시행방법으로, 교회에게 계시하심으로써 선지자 직분을 수행하십니다”고 밝히며, 그리스도의 계시 사역이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구원의 실제적 적용과 공동체 형성의 핵심임을 강조한다.
유해무 박사는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선지자들과 달리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말씀 그 자체이신 로고스로서 인간의 역사 속에 들어오셨다. 그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구현된 계시 사건이었다”고 설명한다.11)
나용화 박사도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은 구속사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드러내는 계시 사역이다. 이는 단순한 예언이 아닌, 그의 가르침과 삶 전체가 통합적으로 작용하여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선포하고 실현하는 방식이며, 예수님은 직접 복음을 선포하시고(마 4:23),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치셨으며(마 13:11), 하나님을 친히 계시하셨다(요 1:18).” 설명한다.12)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적 사역은 구속사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드러내는 계시로 작용하며, 이는 그리스도의 권위 있는 가르침, 기적, 삶의 본이 통합적으로 작용함을 통해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선지자로서 말씀을 선포할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자기의 삶을 통해 성취하신 분이시다(요 14:9).
D.A. 카슨은 “예수님의 선지자적 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임재와 심판, 회복을 동시에 선포하는 종말론적 계시로서, 선지자직의 완성”이라고 평가한다.13) 그는 예수님의 선지자직이 구약의 예언과는 달리, 종말론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복음서 전반에서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 선포, 산상수훈, 비유, 기적의 사역이 바로 그 계시의 현현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은 하나님의 뜻을 단순히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온전히 계시하고 성취하는 사역이다. 그분의 계시는 단편적인 부분이 아니라 온전한 구속사의 절정이며, 인간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있는 유일한 길로서 작용한다(요 17:3).
2. 제사장적 직분: 완전한 대속과 중보
예수 그리스도는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생명을 속죄 제물로 드림으로써 인류의 죄를 완전히 사하시고,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중보하시는 사역을 감당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구약 제사 제도의 예표를 성취하는 종말론적 완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백성을 대신하여 희생 제물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죄 사함의 은혜를 상징적으로 나타냈으나, 그 제사는 반복되었으며 영원한 속죄를 이루지 못했다(히 10:1-4). 이러한 제한된 제사 체계는 단지 장차 오실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할 뿐이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1-12)고 증언함으로써, 예수님의 제사장직이 단회적이고도 완전한 구속을 성취했음을 강조한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44문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그리스도는 제사장으로서 한 번 자기를 제물로 드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으며, 또 계속해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신다.” 이 신앙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단지 과거 사건에 그치지 않고, 현재에도 중보자로서의 사역을 지속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용화 박사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예수님은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셨으며, 동시에 중보자로서 죄인의 연약함을 아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신다.”14) 그는 또한 “예수님의 희생은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제사의 종결이며, 새 언약의 제사로서 완전하고 단회적인 속죄 사역”이라고 강조한다.15)
바빙크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완전한 화목의 사역"이라고 평가하며, 구약의 제사장들과 달리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흠 없는 제물로 드릴 수 있었음을 지적한다.16) 그는 “그리스도는 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시키는 일을 동시에 감당하신다”고 설명한다.17)
유해무 박사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단지 죄의 용서에 국한되지 않고, 성도의 삶 전반에 대한 중보 사역을 포함한다고 본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서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며, 성도들의 거룩함을 위해 지속적으로 사역하신다”고 말한다.18)
존 파이퍼는 제사장직을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의 중심으로 이해한다. 그는 “예수님의 제사장직은 단지 속죄의 기계적인 작용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깊은 사랑에서 비롯된 자기 희생의 행위였다”고 강조하며, 이것이 성도의 삶에 회개와 헌신을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한다.19)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직분은 단회적이고 완전한 속죄를 성취함과 동시에, 오늘날에도 하나님 앞에서 신자들을 위한 중보를 지속하는 사역이다. 이는 인간의 죄책 문제뿐 아니라, 성도의 연약함과 신앙의 유지에 있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구속 사역의 핵심이다.
3. 왕적 직분: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 보호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의 백성을 다스리며 악의 권세를 멸하시는 통치자의 사역을 수행하신다. 구약의 왕들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이스라엘을 통치하며 정의와 공의를 실현해야 했으나, 대부분 불완전하고 제한적인 통치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영원하고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행사하신다(눅 1:32-33).
마태복음 28장 18절에서 예수께서는 부활 후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선포하심으로써, 그가 우주적 통치자로서 왕적 권세를 가지셨음을 나타내신다. 이 권세는 단지 상징적이거나 미래적 개념이 아니라, 현재적으로 교회와 성도를 다스리는 실제적 권능이며, 종말론적으로 온 세상을 심판하시고 회복시키실 왕의 권세이다.
바빙크는 그리스도의 왕직에 대해 "그리스도는 단지 영적 질서의 왕이 아니라, 우주의 주권자이시며, 그의 왕국은 개인의 구원뿐 아니라 창조세계 전체를 회복하는 구속의 통치를 포함한다"고 설명한다.20) 그리스도의 통치는 사탄과 죄의 권세를 꺾고, 그의 백성에게 자유와 생명을 제공하며, 이들을 진리 가운데 인도하는 사역이다(골 1:13-14).
나용화 박사는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로서 자신의 백성을 다스리고 보호하시며,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신다. 그의 왕직은 단지 권위의 상징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인격적인 통치이며, 성도들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적용된다"고 주장한다.21) 그는 특히 그리스도의 왕권이 성례와 말씀의 사역 안에서 교회 질서를 세우고, 성도들을 진리로 다스리는 현재적 통치로 나타남을 강조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8장 1항은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를 다스리는 왕이시며, 그의 원수들을 이기고 최후의 날에 모든 권세를 자기 발 아래 두실 자이시다"라고 선언하며, 왕직의 현재성과 종말성을 함께 강조한다. 이 통치는 단지 세속 권력의 모형이 아니라, 공의와 진리를 바탕으로 한 하늘 통치이며, 궁극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된다(계 21:1-4).
유해무 박사는 그리스도의 왕직을 "성도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키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며, 궁극적으로 영광 가운데로 이끄는 사역"이라고 설명한다.22) 이는 단지 교리를 넘어 실천적 차원에서 성도의 삶을 보호하고 강화하는 실제적 권세를 의미한다.
존 파이퍼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왕적 사역을 통해 단지 죄를 정복하실 뿐 아니라, 성도들의 삶 속에서 자신의 아름다움과 주권을 드러내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존재로 회복시키신다"고 강조한다.23) 그의 통치는 성도를 억압하는 세상의 가치와 죄악에서 벗어나게 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사명을 부여한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직분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직분이며, 교회를 다스리시는 현재적 통치와 세상을 회복하시는 종말적 왕권을 아우르는 포괄적 사역이다. 성도는 이 왕의 통치 아래 거할 때 참 자유를 누리며, 교회는 그의 왕권 아래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서 실현하는 도구로 세워진다.
4. 삼중직의 유기적 통합성과 언약 성취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단순히 세 가지 직분을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신학적 구조가 아니라, 하나의 통일된 구속 사역 안에서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사역의 통합체계이다. 선지자, 제사장, 왕이라는 구약의 세 직분은 각 각 고유한 기능을 수행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 세 직분이 완전하게 통합되며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한다. 이 통합성은 단지 기능적 효율성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이 구속사 전체를 통해 계시하신 언약적 경륜의 완성을 보여준다.
바빙크는 삼중직의 통합적 구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는 단지 여러 직분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 안에서 선지자, 제사장, 왕의 직분을 통합하여 하나님의 구속 목적을 실현하였다.”24) 이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세 직분이 독립적인 영역으로 존재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조화롭게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러한 유기적 통합은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삼중직은 하나님의 언약 경륜, 곧 구속 언약(covenant of redemption)과 구속의 성취라는 구속사 전체를 하나의 구조 안에 담아내는 틀로 기능한다. 나용화 박사는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단지 기능적 사역이 아니라 언약의 성취 방식이며,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실현되는지를 구조적으로 보여주는 틀이다”고 말한다.25)
특히, 예수 그리스도는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함으로써 언약의 약속을 선포하였고(요 17:8), 제사장으로서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 언약의 형벌을 감당하셨으며(히 9:26), 왕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다스리고 보호하심으로 언약 백성의 정체성과 사명을 확정지으신다(마 28:18-20).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8장 1항은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한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세우신 언약의 중보자이며, 그 언약의 대언자(선지자), 제물(제사장), 통치자(왕)이시다”라고 명시함으로써 삼중직의 유기적 구조와 언약 성취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확인한다.
존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이 통합성에 대해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지만, 선지자로서 우리를 인도하고, 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중보하며, 왕으로서 우리를 지키신다”고 설명하며, 이 삼중직이 신자의 구원에 있어 분리될 수 없는 구조임을 강조한다.26)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개별적 사역을 조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계획을 완성하는 유기적 구조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구속사 전체를 하나의 통일된 시야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통합적 삼중직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신자의 전인격적 구원에 미치는 전방위적 영향력과 하나님 나라의 우주적 통치를 드러내는 본질적 통로이다.
5. 문화적 차원에서의 그리스도의 삼중직 적용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단지 신자의 구원에만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 모든 문화 영역까지 포함하는 포괄적 사역으로 확장된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의 ‘칼빈주의 강연’에서 “그리스도는 구속자일 뿐 아니라, 문화의 주권자이며, 그의 통치는 종교, 정치, 과학, 예술을 포함한 모든 삶의 영역을 포괄한다”고 강조한다.27) 카이퍼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문화와 사회 안에서 복음의 질서와 통치를 회복하는 구조로 작용해야 하며, 교회는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선지자적, 제사장적, 왕적 권위를 나타내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28)
선지자적 직분은 오늘날 문화 안에서 진리를 왜곡하는 거짓 담론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는 역할로 확장된다. 이는 기독교 세계관 교육, 윤리적 변증, 공적 담론에서의 복음적 참여 등을 포함한다. 나용화 박사는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은 교회와 신자들이 세상의 이념과 가치관을 성경의 진리로 조명하도록 부르신 것”이라 하며, 진리 선포의 사명을 문화적으로 확장해야 함을 강조한다.29)
제사장적 직분은 중보와 희생의 삶으로 나타나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돌봄, 자비 사역, 나눔의 실천 등으로 구현된다. 유해무 박사는 "제사장직은 교회 안에서의 예배와 중보를 넘어서 세상에서의 자기희생적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설명한다.30) 따라서 신자는 단지 교회 안의 제사장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드러내는 사역자이다.
왕적 직분은 사회와 문화의 구조 안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구현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이는 가정, 교육, 정치, 경제 등의 영역에서 공의와 질서의 회복을 위한 기독교적 책임과 실천을 의미한다. 바빙크는 “그리스도의 왕권은 단지 종교적 차원을 넘어 창조 질서 전체의 회복과 다스림으로 확장된다”고 말하며, 신자들이 그 영역에서 하나님의 질서를 선포하고 실현해야 함을 강조한다.31)
결국, 삼중직은 교회 안에 머무는 폐쇄적 구조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고 확장하는 선교적, 문화적 소명으로 연결된다. 삼중직은 오늘날의 문화적 혼돈 속에서 기독교가 수행해야 할 구체적 역할을 정의해 주며, 이는 개혁주의 신학이 지닌 공공성과 실천성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Ⅲ. 그리스도와의 연합
1.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신학적 의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의 서정(ordo salutis)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포괄적이며 중심적인 신학적 구조이다. 신자는 오직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만 칭의, 성화, 양자됨, 영화 등 구속의 유익에 실제로 참여할 수 있으며, 이 연합은 언약적, 존재론적, 신비적 차원을 아우른다. 존 칼빈은 이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신의 몸 안으로 받아들이시는 비밀한 연합”(mystica unio)이라 부르며, 이 연합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우리와 무관하다”고 단언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연합은 단순한 인격적 친교를 넘어서, 신비하고 실제적인 참여의 관계이다.32)
루이스 벌코프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자의 모든 구원적 축복의 근원”이라고 하며, 그 안에서 칭의, 성화, 양자됨, 영화 등의 모든 구속적 은혜가 흘러나온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 연합을 “성령에 의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신비한 실제 관계”로 보며, 단 순한 상징이나 심리적 연결이 아니라 구속의 실재적 통로임을 강조한다.33)
나용화 박사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단지 인격적 관계를 넘어서 언약적 구조와 존재론적 일치를 포괄하는 신비적 실재”로 설명하며, 이는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도 신자 안에 계시는 상호 내주(indwelling)의 실재로 본다.34) 이 연합은 인간의 인식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역사이며, 성령의 중재로 말미암아 성취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론적 전제이자, 구속사의 중심 축으로 자리매김한다.
이 연합의 실체는 언약 신학의 맥락 안에서 보다 명확하게 이해될 수 있다. 첫 번째 아담과의 연합으로 인한 타락의 결과가 인류 전반에 전가된 것처럼,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자에게 의와 생명을 전가한다(롬 5:18-19). 이 연합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풍성함을 신자에게 적용하는 교량 역할을 하며, 신자의 정체성과 삶의 전 영역을 형성하는 결정적 요소가 된다.
2. 언약적 관점에서 본 연합의 기초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단순히 신자 개인의 종교적 체험이나 신비적 직관의 결과가 아니라, 창세 전 삼위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구속 언약(covenant of redemption)과 성부 하나님의 작정(decree)에 기초한 언약 신학의 중심 구조이다. 이 언약적 기초는 신자의 구원이 우연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미리 계획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속의 언약적 질서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5면에서 이어서
나용화 박사는 이 점을 분명히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창세 전에 하나님이 정하신 언약의 질서 안에서 역사 속에 실현되는 성령의 사역”이라 하여, 연합이 삼위 하나님의 내적 협의에 기초하고 있음과 동시에 성령에 의해 실제로 적용되는 구속의 질서를 포함한다고 설명한다.35)
구속 언약에서 성부는 택자들의 구속을 위해 성자를 보내시기로 작정하시고, 성자는 인류를 대신하여 순종과 대속을 완수하시며, 성령은 그 구속을 실질적으로 적용하시는 사역을 감당하신다. 이러한 삼위 하나님의 언약적 협력은 연합의 본질을 존재론적이고 구속사적으로 뒷받침한다. 이로써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단지 신자의 주관적 응답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계획에 따라 일방적으로 부어진 은혜의 결과인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7장 3항은 이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두 번째 언약, 곧 구속의 언약을 맺으셨다. 이 언약에 따라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택자들의 중보자로 주시고,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에게 생명과 구원의 모든 유익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이러한 언약적 구조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은 단지 한 사람의 순교나 감정적 사랑의 표시가 아니라, 언약 백성 전체를 대표하여 이루어진 법적·대리적 순종과 대속이다. 바울이 말한 “그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자”(엡 1:4)는 이 연합이 개별적 경험이 아니라 공적이고 언약적인 대표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단지 구원의 시작을 위한 조건이 아니라, 언약 안에 참여하는 모든 구속의 은혜(칭의, 성화, 영화)의 통로이며, 성도는 이 연합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 언약의 자녀로 받아들여진다. 칼빈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접붙여지기 전에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은혜도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며, 이 연합을 구속의 실체에 도달하는 유일한 경로로 간주했다.36)
3. 연합의 성경적 기반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o)은 단순한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증거되는 구속의 실재이다. 성경은 이 연합의 진리를 다양한 비유적 상징과 직접적 진술을 통해 계시하며, 신자가 그리스도와 맺는 내적이고 실재적인 관계의 깊이와 본질을 설명한다.
예수님은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5)고 하시며, 유기적 연합의 구조를 밝히셨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생명을 공급받을 수 있으며,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이는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을 때에만 영적 생명과 성화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강조되는 연합은 존재론적 결합일 뿐만 아니라 영적 생명 교통의 실재적 통로이다.
바울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혼인 관계로 설명하며,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2)라고 말한다. 이는 단순한 상징을 넘어서, 신자 개개인이 언약적 사랑과 책임, 헌신의 관계 안에서 그리스 도와 결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비유는 언약적-사랑의 차원과 공동체적 연합의 실재를 동시에 드러낸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는 진술은 신자들이 그리스도라는 머리와 실제로 연합된 존재임을 선언한다. 이는 단순한 신앙 공동체의 연대가 아니라, 성령을 통한 실제적 결합(고전 12:13)으로서의 연합을 나타낸다. 이 구조 속에서 성도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사역의 은사를 나누며,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간다.
사도 바울은 “in Christ”라는 표현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신자의 존재론적 정체성으로 강조한다. 에베소서 1장 3-14절에서는 신자들이 창세 전에 선택된 것(1:4), 아들의 명분을 얻은 것(1:5), 죄 사함을 받은 것(1:7),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것(1:13)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사실로 진술된다. 즉, 신자의 모든 구속적 복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주어진다. 바울에게 있어서 연합은 단지 구원의 전제가 아니라, 구원의 모든 국면이 흘러나오는 원천적 위치이다.
바빙크는 “이 연합은 단순한 상징이나 감정적 결합이 아닌 실제적이고 영적인 연합이며, 이는 성령에 의해 내주적이고 실재적으로 성도 안에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37)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성례나 외적 소속감으로 대표되는 명목적 관계를 넘어서, 그리스도의 생명에 실제로 참여하는 영적 현실이다. 이는 존재론적이며 성령론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바로 이 점에서 개혁주의 전통은 연합의 실재성과 능동성을 강조한다.
4. 성령의 사역과 연합의 적용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단순한 신학적 관념이나 선언적 교리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신자의 삶에 적용되고 경험되는 구원의 실제이다. 이 연합의 적용은 무엇보다 성령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진다. 즉, 성령은 신자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주체이자 통로로서 기능하며, 연합의 가능성과 실현을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에 의존한다.
나용화 박사는 성령의 사역을 “연합을 이루는 능동적 중재자”로 정의하면서, 성령께서 회심(conversio), 중생(regeneratio), 믿음(fides)을 통해 신자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구조를 강조한다. 그는 "성령께서 죄인을 내면으로부터 변화시키고, 신자가 믿음을 가지도록 이끄심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시작된다"고 설명한다.38)
칼빈 역시 성령의 역할에 대하여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그는 「기독교 강요」에서 성령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실현하는 유기체적 통로”라고 부르며, "우리는 성령의 은밀한 역사 없이는 결코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은혜가 실제적으로 신자에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내적 사역이 필요함을 강조하는 것이다.39)
성령의 연합 사역은 단지 구원의 시작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전(全)구속사적 과정, 곧 칭의(justificatio), 성화(sanctificatio), 견인(perseverantia), 영화(glorificatio) 등 구원의 모든 국면에 관여하며, 연속적이고 지속적인 특성을 지닌다. 성령은 신자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끊임없이 역사하시며, 연합의 유익이 점진적으로 드러나도록 이끄신다.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일회적인 체험이 아닌, 구원의 여정을 관통하는 존재론적이고 점진적인 신적 관계의 구조이다.
결국, 성령의 사역은 구원의 적용(application of salvation)의 중심에 있으며, 신자가 그리스도의 의를 입고 그 생명에 참여하며, 그분의 고난과 영광에 동참하게 되는 모든 실제적 과정의 주도자이시다. 이는 구원론적 유익들이 단순히 외부로부터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실현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갖는 실체적 의미를 더욱 뚜렷하게 보여준다.
5. 연합의 실천적 함의(교회, 성도, 공동체 차원)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단순히 개인의 구속 경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교회 공동체 전체의 정체성과 사명, 그리고 실천적 삶의 근간을 형성하는 신학적 핵심이다. 연합은 교회를 구성하고 움직이게 하는 본질적 구조이며, 신자의 삶 속에서 다양한 차원으로 실현된다.
유해무 박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개인 구원의 차원을 넘어서 교회의 존재 자체를 구성하는 실재”라고 말하면서, 연합이 교회의 교회됨의 본질적 조건임을 강조한다.40) 곧 교회는 단지 신자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의 유기체적 몸을 이루는 공동체이며,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의 공동 정체성 위에 존재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교회를 몸으로 비유하면서 각 성도가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지체로서 공동체를 이루며, 동일한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이룬다고 가르친다(고전 12:12-27).
이 연합은 교회 내에서 구체적으로 실천되는 방식으로, 성도의 공동체적 책임, 직분의 수행, 상호 돌봄과 권면을 통해 나타난다. 이는 연합이 단지 신비적 경험이 아닌, 실제적이고 윤리적 결과를 낳는 구조임을 보여준다. 즉, 연합은 ‘성도의 교제(koinonia)’라는 형식으로 표출되며, 이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수평적으로 확장된 결과이다.
특히, 성례전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공동체적으로 실현하고 갱신하는 구체적 방편이다. 세례는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함으로써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되는 실재적 연합을 나타낸다(롬 6:3-5). 또한 성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실제로 참여함으로써, 신자가 그리스도와, 그리고 공동체와 더욱 깊은 연합을 누리는 은혜의 수단이다. 고린도전서 10:16-17은 성찬의 참여가 단지 상징이 아닌 실제적인 영적 참여임을 증언한다.
마이클 호튼은 성례에 대해 "성례는 단순한 표징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수단"이라고 평가하면서, 성례가 신자 개개인의 신앙을 넘어서 교회의 공동 정체성과 지속적인 연합을 형성하는 거룩한 통로임을 강조한다.41)
이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단지 구속의 출발점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존재론적 기반이며, 공동체 내의 윤리적 실천, 성례전의 실제, 그리고 성도의 삶 전반에 적용되는 역동적 실재이다. 따라서 연합은 교회론적, 성례론적, 영성 형성적 차원에서 실천되어야 하며, 이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이 교회를 통해 역사 속에 실현되도록 하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도 직결된다.
6. 삼위일체 구속사의 틀에서 본 연합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단순히 신자 개인의 감정적 경험이나 도덕적 연대감을 의미하지 않는다. 개혁주의 신학은 연합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사적 사역의 총체적 흐름 속에서 이해한다. 다시 말해, 이 연합은 성부의 예정, 성자의 구속 사역, 성령의 적용이라는 구속사의 삼중 구조 안에서 실현된다.
성부 하나님은 창세 전에 택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셨고(엡 1:4),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하여 속죄 사역을 감당하셨다(롬 8:29-30). 그러나 이 모든 객관적 구속은 성령의 적용 없이는 신자에게 실효적으로 미치지 않는다. 칼빈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유익은 성령의 비밀스러운 역사 없이는 우리에게 도달할 수 없다.” 그리고 그는 성령을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결하는 유대의 끈(bond)”이라 표현한다. 이는 단순한 내적 감동이나 영적 자극이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이 성령의 사역을 통해 시간과 역사 속에서 실제로 적용된다는 신학적 인식이다.42)
이 점에 대해 나용화 박사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언약적 차원과 존재론적 차원이 동시에 작동하는 구조로, 단순한 인격적 관계를 넘어서 존재론적 일치와 신적 생명의 참여를 포함한다”고 말하며, 성령의 역할을 단순한 감화의 도구가 아닌, 구속언약의 실현자로 파악한다.43) 다시 말해, 연합은 법적 차원에서 성부의 선택과 성자의 속죄를 전제하고, 실존적 차원에서는 성령이 신자의 존재 깊은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실제로 공유하게 만드는 참여적(real participatory) 현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단순히 은혜의 수혜자로서의 신자의 위치를 넘어서, 성령을 통해 실현되는 구속사의 열매이며, 삼위 하나님의 협력적 사역 안에서 신자의 삶 전체를 새롭게 구성하는 존재론적 전환이라 할 수 있다. 이 연합 속에서 신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며(롬 6:3-5), 성부의 자녀로서 성령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롬 8:14-17). 이러한 구속사의 유기적 연속성은 구원의 적용이 단지 개별적 감정의 변화가 아니라 삼위일체적 구원의 통전적 구현임을 보여준다.
7.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전인격적 구조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단지 구원의 한 측면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신자의 전 인격을 포괄하는 총체적이고 존재론적인 참여이며,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삶 전체가 재구성되는 전환의 실재이다. 다시 말해, 이 연합은 인간의 이성, 감정, 의지, 신체적 행위에 이르기까지 전 존재가 그리스도 안에 접붙여지는 구속적 통합(unitive transformation)을 의미한다.
바빙크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명확히 설명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인간 존재의 전 구조에 영향을 미치며, 단지 종교적 감정이나 인식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연합이 단지 신비적 체험이나 신학적 개념이 아닌, 인간 실존 전체에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존재론적 통합'임을 강조하며, 이는 이성과 감정, 의지와 삶의 모든 실천까지 포함된다고 주장한다.44)
이러한 전인격적 연합은 성경에서도 반복적으로 강조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17절에서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 선언하며, 단순한 감정적 결합이 아닌 실질적인 존재의 연합을 진술한다. 또한 로마서 12장 1-2절은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것을 요청함으로써, 연합이 신체와 행위까지 포함된 전인적 실천임을 강조한다. 이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자에게 이성과 감정, 삶의 방식, 윤리, 관계, 문화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인 영향력을 미친다.
유해무 박사 또한 “연합은 단지 구속의 수단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존재론적 전환을 일으킨다”고 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의 형태와 방향이 발생한다고 강조한다.45) 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제자도의 기초로 이해하며, 이 연합이 신자의 윤리적 선택, 공동체 내 책임, 그리고 세상을 향한 문화적 사명에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단지 내면의 믿음이나 신앙적 고백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신자의 모든 삶의 국면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주권(lordship)을 고백하며, 그 통치를 삶 속에서 실제화하는 총체적 제자도의 근거이다. 이 연합은 신자에게 새로운 존재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그것이 일상의 윤리, 교회적 책임, 그리고 세상 속의 소명 실천으로 확장되도록 만든다.
8. 연합과 실천 신학적 적용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단순히 이론적 개념이나 교리적 정의로 끝나는 주제가 아니다. 그것은 신자의 신앙 여정과 교회 공동체의 삶 전반에 실천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구속사적 현실이자 교회적 정체성의 중심축이다. 이 연합은 예배, 성례, 제자훈련, 공동체 생활, 선교, 영성 형성 등 모든 교회적 실천의 기반을 형성한다.
예배는 단순한 신앙 고백의 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참여의 자리이다. 히브리서 12장 22-24절은 신자들이 하늘의 시온 산, 하늘의 교회 공동체에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이는 곧 연합의 실재가 예배를 통해 현재화되고 경험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특히 성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언약적 갱신의 수단이다. 세례는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존재론적 전환을 선포하는 의식이며(롬 6:3-5), 성찬은 신자가 그리스도 의 몸과 피에 참여함으로써 연합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경험하는 예식이다(고전 10:16-17). 마이클 호튼은 성례를 두고 “성례는 단순한 표징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수단”이라고 평가하며, 그것이 단지 신자의 개인적 신앙에 국한되지 않고, 교회의 공동 정체성과 지속적 연합을 형성하는 통로임을 강조한다.46)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단순히 개인 구원의 차원을 넘어서, 교회 공동체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근본적 원리이다. 유해무 박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개인의 구속을 넘어서 교회의 존재 자체를 규정하는 실재”라고 설명하며, 공동체가 한 몸으로 부름받았음을 강조한다.47) 고린도전서 12장 12-27절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하면서, 각 성도가 지체로서의 기능과 책임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또한, 제자훈련 역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의 신분과 정체성에 기초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제자훈련은 단지 성경 지식을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연합의 실제를 따라 삶을 새롭게 훈련하고 교정하는 과정이다. 연합은 곧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의 방식”(갈 2:20)을 살아내도록 이끈다.
선교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사명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세상을 향한 정체성의 구현이다. 고후 5:17-20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는 곧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위임받은 자라고 말한다. 연합은 단지 사적 축복의 근거가 아니라, 세상을 향한 공적 책임의 출발점이다.
아울러, 일상의 삶 속에서 실천되는 영성 역시 연합된 자로서의 인격적 삶으로 나타난다. 연합은 신자가 단지 구속받은 존재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구속의 삶을 매일의 삶 속에서 구체화시키는 영적 훈련을 요청한다. 즉, 연합은 신자의 직장, 가정, 정치, 문화, 소비, 관계 등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고백하고 실현해 가는 실제적 토대가 된다.
나용화 박사는 이 실천적 측면을 강조하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실제적 공동체를 형성하게 하며, 신자 개개인의 성화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의 거룩을 추구하게 한다”고 설명한다.48) 다시 말해, 연합은 공동체적 성결과 윤리적 정체성을 요구하는 신적 부르심의 실천적 열매로 연결된다. 이는 단지 윤리주의가 아니라, 연합에 근거한 하나님의 형상 회복과 구속사적 변화의 요청이다.
Ⅳ.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얻는 이중적 유익
1. 칭의의 신학적 의미와 연합과의 관계
칭의(Justificatio)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의롭다고 법적으로 선언(juridical declaration)하시는 구속사적 사건이다. 이는 단순히 죄인의 신분 변화에 대한 외적 평결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righteousness of Christ)가 신자에게 전가(imputatio)되어 주어진 실재적 은혜의 선물이며, 이 은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o)이라는 구조 안에서만 적용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칭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구원의 법적 열매이다.
1) 칼빈의 관점: 연합 없는 칭의는 무의미하다.
존 칼빈은 이 연합의 절대적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신의 몸 안으로 받아들이시는 비밀한 연합(unio mystica) 없이는, 그분이 받은 모든 유익이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49) 칼빈에게 있어 칭의는 그리스도께서 단회적으로 성취하신 구속사역 자체보다, 그 사역이 신자에게 어떻게 전가되고 적용되는가가 본질적 과제이며, 이 전가는 성령의 은밀한 역사에 의해 실현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가능하다. 성령께서 우리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이실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로, 즉 그의 의에 참여하게 되며, 그 결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 것이다.
2) 벌코프의 관점: 연합이 전가의 조건이다.
벌코프 역시 개혁주의의 입장에서 칭의를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사법적 행위이며, 이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됨으로 성립된다”고 정의하며, 그 전가의 조건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강조한다.50) 그는 이 연합을 "모든 구속적 축복의 중심 통로(the central channel of salvific blessings)"라고 부르며, 칭의뿐 아니라 성화, 양자, 영화 등 구원의 전 과정이 이 연합에서 흘러나온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는 구속의 객관적 성취(objective accomplishment)와 그 적용(application) 사이를 연결하는 고리로서 연합을 이해하며, 칭의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고는 전혀 발생할 수 없는 사건임을 전제한다.
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구조적 통합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1장 1항은 이러한 연합 중심적 칭의 이해를 명확하게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죄인을 의롭다 하시되,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심으로 말미암으며, 이는 믿음으로 그와 연합됨으로써 수납된다.” 여기서 강조되는 핵심은 ‘믿음으로 그와 연합됨으로써’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칭의가 단지 “믿는다”는 주관적 고백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통해 객관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인격적 결합이 선행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결국 칭의는 연합이라는 언약적·신비적 관계 안에서 법적 지위를 새롭게 부여받는 것이다.
4) 성령의 적용사역: 칭의를 위한 연합의 매개자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성령의 적용사역 없이는 실현될 수 없다. 성부께서 예정하시고, 성자께서 구속을 이루신 이 은혜는, 성령의 역사 안에서 신자의 삶 속에 실제로 적용(applicationis salutis)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나용화 박사는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선포되는 사건이며, 이는 연합 없이 가능하지 않다”고 분명히 강조한다.51) 이처럼 칭의는 삼위일체적 구속 역사 가운데 성령을 통해 주관적으로 적용되는 은혜의 시작점이며, 그 적용의 유일한 통로가 곧 연합이다.
결론적으로, 칭의는 단순한 교리적 명제나 신학적 형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법적 신분이 전환되는 실재적 사건이다. 이 연합은 단순히 관념적이거나 상징적인 연대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 성취된 실제적 관계이자, 의 전가의 필수조건이다. 그러므로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부여되는 하나님의 선언이자,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구속의 첫 열매이며, 이후의 성화와 영화로 나아가는 구속의 관문이 된다.
2. 성화의 과정과 목적
성화(Sanctificatio)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주어지는 이중적 구원의 유익 가운데 하나로서, 칭의와 함께 필연적으로 동반되며,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을 통해 신자의 전 인격이 거룩함으로 변화되어 가는 구원의 실제적 과정이다. 이는 단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신자의 삶 전체를 통해 점진적으로 진행되며, 궁극적으로는 영화(glorificatio)에 이르는 종말론적 방향성을 지닌다.
1) 성화의 정의와 본질
개혁주의 신학은 성화를 단순한 도덕적 개선이 아닌, 성령께서 중생한 신자 안에 실제적으로 내주하시어 죄의 지배로부터 점점 자유케 하시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인격적 갱신의 과정으로 정의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3장 1항은 이를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덕을 입어 실제적으로 거룩하게 되며, 그들 안에 새 마음과 새 영이 창조되고, 죄의 온 몸은 멸해지고 여러 정욕은 점차 약화되고 죽게 되며, 동시에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는 더욱 강화되고 실천된다.” 이 정의는 성화가 단지 외적 행위의 변화가 아닌, 죄의 실재적 지배로부터 해방되며, 내면에서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전 인격적 변화임을 분명히 한다.
2) 성화와 칭의의 관계
성화는 칭의와 구별되지만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구원의 유익이다. 칭의가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법적으로 선언하시는 단회적 선언이라면, 성화는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신자를 실제로 변화시키는 점진적 과정이다. 나용화 박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화는 칭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면서도 구분되며, 신자의 삶 가운데 성령의 역사로 점진적 경건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다.”52) 즉 칭의가 신자의 법적 지위에 관한 것이라면, 성화는 그 지위에 부합하는 삶의 실제적 변화, 곧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사는 내면과 외면의 일치를 이끌어내는 사역이다.
3) 성화의 능동적 동력: 성령과 말씀
성화는 신자의 결단이나 도덕적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자기 변화가 아니라, 성령께서 내주하셔서 신자 안에서 일으키시는 은혜의 역사이다. 성령은 신자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며,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게 하시는 정서적 전환을 일으키실 뿐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구체적인 변화로 인도하신다(롬 8:13, 갈 5:16-25). 또한 성화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루어진다. 말씀은 성령의 검으로서(엡 6:17), 신자의 내면을 비추고 죄를 깨닫게 하며, 올바른 삶의 기준과 방향성을 제시한다(딤후 3:16-17). 그러므로 성화는 반드시 말씀 중심의 삶, 성령 의존적 삶을 통해 견인된다.
4) 성화의 실천 과정
성화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 진행된다.
죄에 대한 회개와 단절: 성령의 깨우침으로 죄를 자각하고, 반복적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옛 자아를 죽이는 훈련(롬 6:6, 골 3:5).
경건의 훈련: 말씀 묵상, 기도, 금식, 공동체 안의 훈련을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를 깊이 있게 지속함(딤전 4:7-8).
은혜의 수단 참여: 예배, 세례, 성찬 등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은혜의 외적 방편에 참여하여 성령의 공급을 지속적으로 받음(행 2:42, 고전 10:16).
하나님 형상의 회복: 이성과 감정, 의지, 삶의 방향까지 전 인격이 점진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감(롬 8:29, 고후 3:18).
5) 성화의 목적: 거룩함과 영화
성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룩한 백성으로 변화되는 것이며, 이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여 영화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벌코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화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의 점진적 일치이며, 이는 구속받은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53) 결국 성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얻은 새 생명이 삶 속에서 구체화되는 과정이며, 그 목표는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되어 하나님 앞에 흠 없이 서는 것이다(엡 5:26-27).
6) 성화의 종말론적 완성과 연속성
성화는 이 땅에서의 여정 동안 완전하게 성취되지 않지만, 마지막 날 영화의 상태(glorificatio)에서 그 완성을 이루게 된다(빌 3:21, 요일 3:2). 성화는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already and not yet) 구원의 실재이며, 성령의 능력 안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은혜의 경주이다(빌 2:12-13).
요약하면, 성화는 단순한 도덕적 개선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기초한 성령의 실제적 역사로서, 신자의 존재 전체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 가는 거룩한 과정이다. 이는 칭의와 구별되지만 불가분적으로 연결되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반드시 동반되는 열매이다.
성화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실현하게 하며, 종말에 완성될 영화의 상태를 향해 나아가는 구속의 여정의 중심 축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실재적인 변화로 나타나는 이 성화의 은혜는, 모든 참된 신자의 삶에 반드시 함께 나타나는 특징이다.
3. 칭의와 성화의 구별과 불가분성
개혁주의 구원론은 칭의(Justificatio)와 성화(Sanctificatio)를 구별하지만, 이 둘을 결코 분리하지 않는다.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 앞에서 죄인이 의롭다 여김을 받는 단회적 선언이며, 성화는 신자가 실제로 거룩해져 가는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과정이다. 이 두 유익은 모두 오직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주어진다.
1) 칭의와 성화의 구별성
정통 개혁주의는 칭의와 성화를 명확히 구별한다. 칭의는 법정적 선언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신자에게 전가(imputatio)하심으로 이루어진다. 존 칼빈은 칭의를 “하나님의 법정 앞에서 신자를 의롭다고 선언하는 은혜로운 행위”로 규정하며, 이것이 오직 믿음에 의해 가능하다고 강조한다.54) 반면, 성화는 신자의 삶 속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실재적이고 점진적인 변화로서, 신자의 내면적이고 윤리적인 변화를 강조한다.55) 나용화 박사는 이를 “존재론적 변화의 과정”으로 설명한다.56)
2) 칭의와 성화의 불가분성
하지만 정통 개혁주의에서 칭의와 성화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유기적 구조를 이룬다. 이 구조는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o)”이라는 교리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칼빈은 “이중적 은혜(duplex gratia)” 개념을 사용하며,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우리는 동시에 의롭다 하심을 받고 거룩하게 되는 은혜를 입는다”고 역설한다.57) 벌코프 역시 이 두 유익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동시에 적용되며, 성화 없는 칭의는 “죽은 믿음”과 같다고 경고한다.5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역시 “칭의된 자들은 동시에 성화된다”고 명시함으로써 이 둘의 불가분성을 신학적 근거로 제시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3장 1항).
3)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믿음의 역할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칭의와 성화를 연결하는 핵심 구조로,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믿음은 성령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신자에게 적용하시는 방편이며, 이 믿음을 통해 신자는 칭의와 성화의 유익을 함께 받는다. 즉, 믿음은 법정적 선언인 칭의를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동시에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성화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 통로이다.59)
4) 성경적 근거
성경은 칭의와 성화의 불가분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칭의(롬 3-5장) 이후 즉각 성화(롬 6-8장)를 논의하며 이 둘의 유기적 연결성을 나타낸다. 고린도전서에서도 바울은 신자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강조하여 이 두 유익의 동시성을 분명히 한다(고전 6:11).
결론적으로, 정통 개혁주의는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면서도, 이 둘을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불가분적으로 연결하여 하나의 구원론적 구조를 형성한다. 이는 신자가 구원의 여정에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며, 동시에 성령의 능력으로 실제 삶의 거룩함을 점진적으로 이루어가야 함을 의미한다. 이 균형 잡힌 이해가 참된 개혁주의 신학의 특성이자 성경적 구원론의 핵심이다.
4. 이중적 유익에 대한 개혁신학자들의 통합적 논의
개혁주의 신학에서 ‘이중적 유익(duplex beneficium)’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파생되는 핵심적 구속의 혜택으로서, 단순히 교리적 개념에 머무르지 않고 신자의 실제 삶에 직접 영향을 주는 실재적 진리로 강조된다. 이중적 유익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논할 때 결정적 틀이며, 이 둘은 서로를 대립시키지 않고 통합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1) 현대 복음주의 교회의 이중적 유익 왜곡 문제
현대 복음주의 교회 내에서는 때때로 ‘급진적 은혜(Radical Grace)’ 혹은 ‘값싼 은혜(Cheap Grace)’의 흐름 속에서 칭의만을 강조하고 성화의 삶은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시키는 문제가 나타난다. 나용화 박사는 “칭의는 단회적 선언이지만, 결코 성화를 배제하거나 대립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불가분적으로 발생하는 열매”라고 말한다.60) 이처럼 칭의가 성화 없는 선언으로만 이해될 경우 신자는 자기중심적 구원의 확신에 안주하고 거룩의 삶을 외면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존 파이퍼는 이와 같은 오류를 비판하며 “하나님은 우리를 칭의하시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성화시키기 위해서도 우리를 부르셨다”고 강조한다. 그는 “참된 칭의는 반드시 성화를 수반하며, 그것이 없으면 칭의도 진정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61) 이는 팀 켈러(Tim Keller)의 논의와도 일맥상통하는데, 그는 ‘복음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가 반드시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지적한다.62)
반면, 일부 교회에서는 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다가 율법주의(Legalism)의 함정에 빠지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는 성화를 인간의 노력에 의한 도덕적 향상이나 규칙의 준수로 오해하게 만들며, 결과적으로 은혜에 대한 의존이 약화된다. 이 양극단, 즉 반율법주의(Antinomianism)와 율법주의는 모두 개혁주의가 경계하는 오류이다. 루이스 벌코프는 칭의와 성화가 모두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동시에 일어나며, 둘은 논리적으로 구분되되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구속의 은혜의 쌍둥이’라고 말한다.63)
2) 개혁신학자들의 통합적 균형
개혁주의 전통은 칼빈의 ‘이중 은혜(duplex gratia)’ 개념에 따라,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칭의와 성화가 동시에 주어지는 구조적 통합성을 강조한다. 칼빈은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동시에 의롭다 함을 받고 거룩함에 이른 다”고 주장하며, 이를 이중적 은혜의 본질로 이해하였다.64)
유해무 박사는 이중적 유익의 실천적 함의를 강조하면서, “이 유익은 단지 신자의 내면적 확신에 그치지 않고 성례와 교회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으로 경험되고 성장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 유익이 ‘하늘의 구원’뿐 아니라 ‘지상의 삶의 변혁’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지적한다.65)
나용화 박사는 칭의와 성화의 구분과 통합에 대해 명료하게 설명하며, “칭의는 의의 전가(imputatio)를 전제로 하되, 성화는 성령의 내주와 실재적 갱신이라는 구원의 다른 차원을 이룬다”고 강조한다.66) 그는 성화가 신자의 삶 속에서 점진적으로 성취되는 하나님 나라의 지배 아래 놓인 실재라고 설명한다.
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관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또한 이중적 유익에 대해 명확히 진술하고 있다. 제11장(칭의)과 제13장(성화)은 각각 칭의와 성화를 설명하면서도, 그 둘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부터 비롯되며, 동시에 주어지는 은혜”라고 설명한다. 또한 제16장(선한 행위)은 성화의 열매로서의 선한 삶이 칭의의 근거가 될 수는 없으나, 그것이 없는 칭의는 참된 구원이 아님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
이처럼 개혁주의 신학은 이중적 유익에 대해 명확한 구별을 전제로 하면서도, 성령의 사역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된 통합성을 견지한다. 이는 현대 교회가 겪고 있는 신학적 불균형, 특히 반율법주의와 율법주의라는 두 극단에 빠지지 않고, 은혜에 의한 참된 칭의와 성화의 삶을 함께 추구하도록 하는 신학적 기반을 제공한다. 궁극적으로 이중적 유익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경험되는 하나님의 전인격적 구원의 실재이며, 이는 신자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할 복음적 열매이다.
5. 칭의와 성화의 종말론적 완성과 영화
칭의와 성화는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써 얻게 되는 현재적 유익이지만, 이는 구원의 여정 가운데 완전한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중간 단계에 해당한다. 궁극적으로 이 모든 유익은 영화(Glorificatio)라는 종말론적 완성의 정점에서 절정을 이룬다.
바빙크는 “영화란 성도가 최종적으로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며,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온전히 변화되는 종말론적 상태이다. 이 영화는 단지 죽음 이후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새 창조의 성취 안에서 신자의 전 인격이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하는 것까지 포함한다”고 설명한다.67) 이러한 관점은 구원의 유익이 단순히 현세적, 심리적 안정이나 도덕적 개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구속 계획 전체와 직결된 우주적 차원의 완성을 지향함을 보여준다. 성부의 예정, 성자의 구속, 성령의 적용을 통해 시작된 구원의 사역은 영화의 단계에서 완전한 구속의 실현과 하나님 형상의 완전한 회복으로 나아간다.
벌코프 또한 이 점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칭의와 성화는 모두 영화의 시작이며, 종말론적 성취는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연합 안에서 이루어진다.”68) 이러한 종말론적 완성은 단지 개인의 죽음 이후 상태나 하늘나라에서의 안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자의 전 인격이 완전히 새롭게 되어, 영과 육이 모두 영광스럽게 변화되며,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 속에 영원히 거하는 상태를 지칭한다(롬 8:30; 고전 15:49-54).
결국,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비롯된 칭의와 성화는 단절된 독립적 사건들이 아니라, 영화로 향하는 하나의 통합적 구속 여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여정의 목표는 단순히 죄에서의 해방이나 성품의 성화가 아닌,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새 창조의 공동체로 완성되는 것이다. 이는 모든 구속의 유익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유기적으로 결합된 연속적인 사역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Ⅴ. 성례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1. 세례: 언약 백성으로서의 연합의 표징
세례는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객관적인 표징(sign)과 인침(seal)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었음을 나타내는 언약적 행위이다(롬 6:3-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8장은 세례를 “은혜의 언약 안으로 접붙여짐의 표이며 인침”이라 설명하면서, 세례를 통해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 공적으로 인정받는다고 진술한다.
나용화 박사는 "세례는 하 나님의 백성으로의 입문을 의미하며, 이는 단순한 외적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성령의 역사로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나타내는 은혜의 방편이다"라고 설명한다.69) 유해무 박사 또한 세례를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 안에 받아들여진다는 하나님의 선언이며, 성령의 내적 사역과 결합된 외적 표지”로 간주한다.70)
즉, 세례는 단순히 개인의 신앙 고백을 표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연합에로 초대받은 것을 공적으로 증명하는 표징으로서 교회의 권위 아래 시행된다. 이로써 신자는 교회의 공동체에 편입되며, 교회는 세례 받은 자를 언약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
2. 성찬: 영적 연합과 은혜의 확증
성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함으로써, 신자가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되어 있음을 경험하고 확인하는 은혜의 방편이다(고전 10:16-17). 칼빈은 성찬을 “신자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영적으로 먹고 마시는 신비로운 연합의 수단”이라고 강조하며, 이는 단지 기억의 도구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실제로 그리스도와 교통하는 방식이라고 보 았다.7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9장은 성찬을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에 참여하는 수단”으로 정의하며, 성찬이 단순히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의식이 아니라, 실제로 그분의 은혜에 참여하는 사건임을 강조한다. 나용화 박사는 “성찬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이 현재적으로 적용되는 통로이며, 신자는 성찬을 통해 자신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증하게 된다”고 언급한다.72)
이러한 관점에서 성찬은 개인적인 신앙을 강화하는 동시에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연합을 확인하는 상징으로서, 수직적 연합(하나님과의 연합)과 수평적 연합(신자 간의 연합)을 동시에 표현한다.
3. 성례와 성령: 연합의 객관성과 주관성의 조화
성례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객관적인 은혜의 방편이지만, 성령의 내적 사역 없이는 효력을 갖지 않는다. 성례의 효력은 사제나 집례자의 거룩함에 달려 있지 않고, 오직 성령의 역사와 믿음을 통해 신자에게 유익을 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성례는 신자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 믿음으로 받을 때에만 유익하다”고 명확히 진술한다(28장 6항).
나용화 박사는 “성례는 신자의 믿음을 강화하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실증하는 수단이지만, 그것이 참된 은혜의 방편이 되려면 성령의 사역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73) 이는 성례가 단지 형식적인 절차나 반복되는 예식이 아니라, 성령과 말씀의 결합 안에서 능력 있게 작용하는 것임을 시사한다.
성령은 말씀과 성례를 통해 역사하시며, 외적인 표징을 통해 신자의 내적 믿음을 확증하게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례는 단지 객관적 표징일 뿐 아니라, 성령의 사역과 신자의 믿음에 의해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주관적 체험의 통로가 된다.
4. 삼중직과 성례의 통합적 이해
성례는 단순히 표지(sign)와 인침(seal)의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삼중직에 참 여하는 공동체적 통로이다.
첫째, 세례는 제사장직과의 연합을 의미한다. 신자는 세례를 통해 죄 씻음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는 자로 부름받는다(롬 12:1). 나용화 박사는 “세례는 죄와의 단절뿐 아니라 새로운 제사장적 삶을 위한 입문례”라고 말한다.74)
둘째, 성찬은 선지자적 직분과 왕적 직분에 참여하는 행위이다. 말씀을 선포하고 듣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말씀(선지자직)을 체험하며, 그분의 다스리심(왕직) 아래 살아감을 고백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유해무 박사는 "성찬은 단지 과거 사건의 기념이 아니라, 현재의 영적 참여이며 공동체적 언약 갱신의 사건"이라고 강조한다.75)
셋째, 성례는 공동체의 연합과 정체성을 새롭게 하는 실천적 도구이다. 칼빈은 성례를 통해 “우리의 신앙이 외적으로 표명되고 내적으로 강화되며, 성도 간의 유기적 결속이 드러난다”고 하였다.76) 성례는 단지 개인적인 영적 체험이 아니라 교회 전체의 하나 됨을 확증하고 갱신하는 집단적 고백의 장이다. 나용화 박사는 “성례는 단지 표징이 아니라, 공동체의 언약적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교회적 사건”이라 말하며, 성례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정기적으로 실천해야 할 이유를 강조한다.77)
이와 같이 성례는 삼중직의 참여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실질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수단이며, 이는 단지 의례적 상징이 아니라 실제적인 은혜의 통로로 기능한다.
결론
1. 전체 논의 요약
본 논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의 본질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개혁주의 핵심 개념을 중심으로, 신자들이 얻는 이중적 유익인 칭의와 성화를 신학적으로 체계화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선지자, 제사장, 왕) 사역은 타락한 인간을 회복하시기 위한 언약적 구속 사역으로서 온전히 성취되었으며, 이는 단지 법적 선언에 머무르지 않고 신자의 전인격적 삶을 포괄하는 구속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신자에게 실재적으로 적용되며, 이를 통해 신자는 의롭다 함을 받을 뿐 아니라 실제로 거룩하게 변화되는 성화의 길을 걷게 된다. 성례(세례와 성찬)는 이 연합을 가시적으로 표지하고 강화하는 방편으로 기능하며, 신자에게 지속적으로 은혜를 공급하는 수단이 된다.
2. 현대 교회에 주는 신학적·실천적 제언
오늘날 많은 교회와 신자들은 칭의를 강조하면서도 성화의 삶을 소홀히 하거나, 반대로 성화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율법주의적 행위 중심으로 치우치는 두 극단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이 가운데 일부는 믿음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오해 아래 성화 없는 방종으로 흐르고 있으며, 또 다른 일부는 행위를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으려는 시도로 인해 구원의 확실성과 자유를 상실하고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 구원론은 칭의와 성화를 동시에 강조하며, 이 둘을 구별하되 절대 분리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는 칭의의 은혜로 자유를 누리면서도,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화의 열매를 맺는 균형 있는 신앙생활을 추구해야 한다. 믿음으로 칭의를 받은 자는 반드시 성화의 길을 가게 되며, 성화는 칭의의 열매이자 하나님 나라 백성의 표지이다. 이는 율법주의나 반율법주의 모두를 배격하고, 복음의 본질을 따라 전인격적 회심과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 개혁주의 구원론의 통전성과 미래적 전망
개혁주의 전통은 구원의 서정(ordo salutis)과 구속사의 통전적 연결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 중심적, 언약 중심적, 성령 중심적 구원 이해를 발전시켜 왔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중심으로 한 이 구원론은 단지 개인의 구원을 넘어 교회와 사회, 우주적 회복까지 포괄하는 종말론적 전망을 내포하고 있다. 앞으로도 교회는 이 신학적 유산을 바탕으로, 왜곡된 구원 이해에 대한 바른 교리를 선포하고, 신자들이 참된 믿음과 거룩함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할 것이다.
이 논문은 현대 교회가 복음의 은혜를 바르게 이해하고 적용하도록 돕고, 균형 잡힌 칭의와 성화의 구원 여정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이 더욱 실천적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신학적 지침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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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빙크, 헤르만. 「개혁교의학 4」 박태현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1.
· 벌코프, 루이스.「조직신학」 이상원·권경수 역, 서울: CH북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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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per, John. 「Desiring God: Meditations of a Christian Hedonist」 Colorado Springs: Multnomah, 2011.
각주
1)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2」, 박태현 역,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1), 554-556.
2) 나용화, 「성경적 조직신학」, (서울: CLC, 2020), 142-143.
3)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3」, 박태현 역,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1), 432-434.
4)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3」, 375-376.
5) Abraham Kuyper, 「Lectures on Calvinism」, (Grand Rapids: Eerdmans, 1931), 215-216
6) 나용화, 「성경적 조직신학」, 508-519 참조. 이 장에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직, 제사장직, 왕직이 각각 구속의 계시, 속죄, 통치를 수행하는 역할을 하며, 구속의 모든 측면을 아우르는 통합적 직분임을 설명한다. 그는 이 삼중직이 구약의 예표들을 성취하며, 예수님의 삶과 사역 전반에서 구현된다고 밝히고 있다.
7) 유해무, 「유교수의 우리 신조 수업」, (부산: 담북, 2019), 215-217.
8) John Piper, 「Desiring God: Meditations of a Christian Hedonist」, (Colorado Springs: Multnomah, 2011), 204-206.
9) Alister McGrath, 「Christian Theology: An Introduction」, (Oxford: Wiley-Blackwell, 2016), 326-328.
10)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An Introduction to Biblical Doctrine」, (Grand Rapids: Zondervan, 2000), 615-618.
11) 유해무, 「유교수의 우리 신조 수업」, 215.
12) 나용화, 「성경적 조직신학」, 513.
13) D.A. Carson, 「Jesus and His Mission」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15), 243-245.
14) 나용화, 「성경적 조직신학」, 514-516.
15) Ibid., 515.
16)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3」, 378-379.
17) Ibid., 381.
18) 유해무, 「유교수의 우리 신조 수업」, 217.
19) John Piper, 「Desiring God: Meditations of a Christian Hedonist」, 204.
20)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3」, 377-379.
21) 나용화, 「성경적 조직신학」, 517-520.
22) 유해무,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서울 : 영무, 2001), 218.
23) John Piper, 「Desiring God: Meditations of a Christian Hedonist」, 208.
24)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3」, 377.
25) 나용화, 「성경적 조직신학」, 519-520.
26) 존 칼빈, 「기독교 강요 2」, 문병호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20), 2, 15, 1.
27) Abraham Kuyper, 「Lectures on Calvinism」, 93-95. / 28) Ibid., 106-109.
29) 나용화, 「성경적 조직신학」, 511-514.
30) 유해무, 「유교수의 우리 신조 수업」, 220-223.
31)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3」, 457-458.
32) 존 칼빈, 「기독교 강요 3」, 문병호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20), 3, 1, 1.
33) 루이스 벌코프, 「조직신학」, 이상원·권경수 역 (서울: CH북스, 2017), 725-726.
34) 나용화, 「성경적 조직신학」 (서울: 그리심, 2022), 680-681.
35) Ibid., 680..
36) 존 칼빈, 「기독교 강요 3」, 문병호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20), 3, 1, 1.
37)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3」, 521-523.
38) 나용화, 「성경적 조직신학」, 685.
39) 존 칼빈, 「기독교 강요 3」, 3, 1, 1.
40) 유해무, 「유교수의 우리 신조 수업」, 218-219.
41) 마이클 호튼, 「언약적 관점에 서 본 개혁주의 조직신학」, 이용중 역 (서울 : 부흥과개혁사, 2012), 806-807.
42) 존 칼빈, 「기독교 강요 3」, 3, 1, 1.
43) 나용화, 「성경적 조직신학」, 681.
44)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3」,, 528
45) 유해무, 「유교수의 우리 신조 수업」, 219.
46) 마이클 호튼, 「언약적 관점에서 본 개혁주의 조직신학」, 822.
47) 유해무, 「유교수의 우리 신조 수업」, 219.
48) 나용화, 「성경적 조직신학」, 681.
49) 존 칼빈, 「기독교 강요 3권」, 3. 11. 1.
50) 나용화, 「성경적 조직신학」, 691.
51) Ibid., 691. 52) Ibid., 703.
53) 루이스 벌코프, 「조직신학」, 534.
54) 존 칼빈, 「기독교 강요 3권」, 3. 11. 2.
55) 루이스 벌코프, 「조직신학」, 520-522.
56) 나용화, 「성경적 조직신학」, 690-703.
57) 존 칼빈, 「기독교 강요 3권」, 3. 11. 1.
58) 루이스 벌코프, 「조직신학」, 520-522.
59) 유해무, 「유교수의 우리신조 수업」 (서울: 담북, 2019), 214.
60) Ibid, 704.
61) John Piper, 「Desiring God: Meditations of a Christian Hedonist」, 204-206
62) Tim Keller, 「Gospel in Life: Grace Changes Everything」, (Grand Rapids: Zondervan, 2010), 49-53.
63) 루이스 벌코프, 「조직신학」, 529-531.
64) 존 칼빈, 「기독교 강요 3」, 3, 11, 1-6.
65) 유해무, 「유교수의 우리 신조 수업」, 215-217.
66) 나용화, 「성경적 조직신학」, 690-704.
67)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4」, 박태현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1.), 722-724.
68) 루이스 벌코프, 「조직신학」, 532-534.
69) 나용화, 「성경적 조직신학」, 806-807.
70) 유해무, 「유교수의 우리 신조 수업」, 273.
71) 존 칼빈, 「기독교 강요 4」, 문병호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20), 4, 17, 10.
72) 나용화, 「성경적 조직신학」, 808-809.
73) Ibid., 806.
74) Ibid., 807.